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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Sep 20. 2023

(D-25) You're my Energy


대청호 마라톤 D-25


정말 깜짝 놀랐다. 협업기관에서 글쎄, '재충전'의 시간을 갖자며 무려 1박 2일 일정의 교육 계획을 보내왔다. 첫 시간만 상상했는데도 대방전.


회사에서 큰 행사나 중요한 회의를 진행하느라 바쁘고 고된 날은 몸이 과일을 원한다. 싱그럽게 한가득 쌓아놓고 먹고 싶지만 사무실에 그런 게 있을 리 있나. 별 수 없이 커피나 진하게 또 타마시는 것으로 기운 차려야지. 시커멓게 속이 타들어간다.


사무직의 숙명. 어찌하다 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몇 시간을 내리 한 자리에 앉아있는다. 옆자리, 앞자리, 건너 자리 모두 다 리얼한 더미 인형들이 앉아있는 것 같아 오싹할 때도 있다. 

"이러다 몸 버리겠어. 건강 챙기려면 담배라도 피우자." 비흡연자들끼리 하는 말이다. 흡연자들은 최소한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이라도 걸어서 햇볕이라도 쬐고 팔이라도 움직여 담배를 피우니까. 

하지만 진정 그들이 부러운 이유는, 고픈 그것을 딱 필요한 그때에 섭취할 수 있는, 거의 100%에 가까운 실현가능성. 나도 고픈 흑맥주를 필요할 때 캬! 들이켜고 싶은데. 그럼 일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하... 별 수 있나. 시커먼 커피나 또 마셔야지. 


마음이 힘들거나 신경이 많이 긁힌 날은 서둘러 도서관이나 책방으로 향한다. 책공간이 시급한 때니까. 책더미에 파묻혀 있으면 상처가 아무는 것이 느껴진다. 인공호흡을 받는 기분도 든다. 퇴근 후나 주말까지 기다리기 어려우면 책 한 권 들고 차에 들어가 있는다. 5분이라도, 간절하게. 


달리기의 맛을 알고 나서는 시도 때도 없이 뛰고 싶어져 큰일이다. 부장님이 옛날 방식으로 일하라고 할 때, 접대성 식사자리에 나가야 할 때, 내 짬밥에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했을 때, 막무가내인 고객에게 죄송하다고 해야 할 때, 그 외에 많은 때때때. 그럴 때 나가서 딱 한 시간 뛰고 땀 쫙 빼고 시원하게 샤워하면 까짓 거 말끔하게 털어내고 다시 싱그럽게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실현가능성 0%

 

오늘은 그 대방전의 1박 2일 교육 첫날이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한참을 운전해 교육장으로 가니 미간도 승모근도 잔뜩 성나버렸다. 사람들과 무얼 하는 걸 힘들어하는 사회불안증을 숨기고 여섯 명이 원탁에 빽빽이 둘러앉았다. 공황발작 이후로 청력이 예민해져 강사의 크고 높은 마이크 소리를 몇 시간 동안 듣고 있는 게 몹시 괴로웠다. 머리가 동그랗고 다리가 여러 개인 바다생물을 먹으면 위경련이 나는데 점심 메뉴가 낚지 전골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땡땡이를 치고 우리 동네 책방에 간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살기 위한 생존땡땡이였단 말이다. 익숙한 그곳에 앉아 한참 책을 읽고 집으로 가 사과 한 알을 먹었다. 됐다, 이제. 얼른 내일 새벽이 와 다시 달리기만 할 수 있으면 다 되는 거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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