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대회 D-16
이쪽으로 한 발 저쪽으로 한 발, 깜깜해도 지금까지 잘 피해 달렸는데 덜컹.
할머니, 나 오늘 밟고 말았어, 맨홀 뚜껑.
할머니가 하지 말라고 했던 것들 있잖아. 어릴 때는 으, 그만 듣고 싶었는데 어른이 된 어느 날 보니까 나 그것들 다 잘 지키고 있는 거 있지.
가위나 칼은 받는 사람 위험하지 않게 손잡이 쪽으로 건네줘라, 누가 다리 펴고 앉아 있으면 둘러서 가야지 넘어가는 거 아니다, 같이 밥 먹는 사람 신경 쓰이니까 소리 내면서 먹지 말고 밥상 모서리에 앉지 말아라, 힘들게 농사지은 사람 생각해 남은 밥알 한 톨도 소중히 먹어라, 먹을 게 생기면 어른부터 드리는 거다, 책 함부로 다루지 마라, 길 갈 때 한눈팔지 말고 혹시 잘 안 닫혀있어 발 쑥 빠질지도 모르니 맨홀 뚜껑 밟지 마라, 문지방에 서있지 마라(그런데 이건 왜?), 입이 하자는 대로 하면 망한다(할머니, 살아보니까 이거 지키는 게 젤 어려워!)...
할머니, 나 중학교 1학년 때 체육대회 하는 날 우리 학교 오셨던 거 생각나?
초등학교 운동회처럼 가족들 다 오는 건 줄 알고 할머니 왔었지. 운동장에 학생들만 바글바글했는데 교문 즈음에서 두리번거리던 쪼그만 할머니를 내가 딱 발견했지! 얼마나 반가웠던지. 너희들끼리만 하는 거냐고, 머쓱하게 웃던 할머니 얼굴이 너무 좋아서 할머니를 꽉 안고 싶었는데. 내가 그때 할머니를 안았나? 그냥 어깨에 팔만 둘렀나? 친구들한테 우리 할머니 왔다고 자랑하면서 말이야. 할머니가 아이스크림 사 먹으라고 얼마 쥐어주고 갔었는데 용돈은 기억 안 나고 할머니 웃음만 여전히 생생해. 보고 싶어, 할머니.
할머니, 나 요즘 달리기 해.
할머니는 내가 달릴 거라는 거, 알고 있었어? 그렇게 달리기 싫어했던 내가 매일 새벽 뛰고 있다니,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건가봐. 그렇지?
첫새벽, 아직 하늘이 파랗기도 전, 혼자서 조용히 달리고 있으면 좋아. 엉뚱한 생각들을 하기도 하고, 엉뚱한 데 가 있던 생각들을 제자리로 데려오기도 해. 두 가지 다 재밌고 필요한 일인 거 같아. 오늘은 저녁에 우 삼촌이 엄마네 올지도 모른다고 해서 삼촌 생각을 하다가, 이모들 생각도 하고 숙모랑 형 삼촌 생각도 했어. 할머니한테서 나온 내 핏줄들. 우리는 만나면 할머니 이야기를 해, 언제나.
할머니, 엄마가 내년에 칠순이래. 이상하지?
언젠가 엄마가 거실 불을 켜려고 스위치를 누르는데 그 모습이 할머니랑 너무 똑같은 거야. 머리부터 어깨, 등의 곡선이랑 손가락이 굽은 모양까지 전부 다. 와, 엄마가 할머니 딸 맞네, 친딸이네, 그 생각했다니까. 나도 나중에 불 켤 때 저 모습 되나? 되고 싶어! 하면서. 나는 할머니의 딸의 딸이니까. 그 자글자글하던, 세월 켜켜이 쌓여 굽어있던 손가락 다시 만지고 싶어. 할머니, 보고 싶어 많이.
이틀 전 꿈에 할머니 집에 갔어. 할머니가 거실에 앉아 보름달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어. 방실방실 할머니가 많이 웃어서 우리가 다 같이 행복했어.
그래서 할머니, 내가 어떻게 했는 줄 알아? 오늘 로또를 샀어. 할머니가 추석이라고 함박웃음으로 나를 찾아와 줘서 내가 얼른 로또를 샀어. 할머니, 나 회사 다니기 싫어, 응? 이거 1등 되면 할머니 새끼 6명 다 얼마씩 나눠줄게 내가. 응? 응? 응? 할머니~~ 추석이잖아~~~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