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8)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요

by 이우주


마라톤 대회 D-18


규칙적인 루틴으로 매일을 보내는 것을 편안해하는 내게 긴 명절은 썩 달갑지 않은 연휴였다. 하지만 올해는?

가뜩이나 긴 목을 쭉 뽑아 빼고 추석을 기다리고 있다. 무려 6일 동안이나 새벽 시간에 쫓기지 않고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빨리 와요, 추석님. 제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요.


어제와 그제 비가 내려 꼼짝없이 체육관 안에서 달리다 오늘 새벽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 달렸다. 비가 흩뿌리고 있었지만 상관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역시 운동화 신은 발은 땅 위를 굴러야 제 폼이 난다. 세 달쯤 새벽 달리기를 해오니 어두컴컴한 곳에서 뛰어야 제 자리에서 할 일을 하는 기분이다.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내키는 대로 방향을 틀어 뛰어나가는 것이 달리기의 제 맛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에 콧물도 훌쩍거리지 않으면서 기분 좋게 달렸다. 속도에 얽매이지 않고 일정한 페이스로 아무 생각 없이 달리고 있으려니 달리기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사람을 풍요롭게 만드는가, 잠시 감성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아뿔싸. 큰길로 나오니 눈에 띄는 곳마다 내걸린 현수막들. 열에 여덟은 읽는 이들에게 추석이 되라고 한다. '풍요로운 한가위 되세요' '즐거운 추석 명절 되시기 바랍니다' 아니 왜 저한테 추석이 되라고 하시는 거예요!

'부자 되세요'는 땡큐, 고마운 덕담. 우리 같이 부자 되자고요! '건강한 달림이 되세요'도 땡큐, 감사합니다. 우리 같이 달려요!

하지만 나에게 한가위가 되라거나 설 명절이 되라거나 연말연시가 되라는 건 정말이지 무리한 요구. 그것도 가족과 함께 그리 되라는 건 집안 몽땅 인간 그만하라는 얘기.


이런 현수막 다는 이들의 코앞에는 추석보다 시급하게 정치의 힘이 필요한 일들이 산적해 있을 테고, 현수막은 우리가 낸 세금으로 만들 테고, 추석이 지나면 이 많은 폐현수막들 다 쓰레기가 될 텐데.

쓸데없는 현수막 못 달게 법으로 금하면 안 될까? 풍요로운 추석은 각자 알아서, 나는 달리기로, 내 동생은 조각시간에 하는 독서로, 내 중학생 친구 달무리나는 아시안 게임으로, 내 도반 똘라뷔는 맨발로 황톳길을 걸으며 알아서 잘 보낼 거니까 현수막 오염은 이제 그만. 하, 이 얘기를 그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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