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2) 신사와 달리기

by 이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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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대회 D-12


동호회 회원들의 속도에 맞추어 완주하기엔 아직 나의 페이스가 쳐진다. 무리의 꼴찌로 달리다가 점점 간격을 벌려(능동형 동사지만 상황은 수동형으로) 따라가고, 정신 차려보면 나는 여기에 그들은 저기 멀리에.


그럼에도, 더군다나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걸 몹시 어려워하면서도 달리기 모임에 나가는 건

1) 끄트머리에 서더라도 여럿이 달리면 혼자 뛸 때보다 속도가 나고

2)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달리게 되더라도 불쑥불쑥 마주치는 회원들에게 "파이팅!" 세례를 받을 수 있고(달리기가 아니라면 누가 나에게 그토록 힘차게 파이팅을 외쳐줄까)

3) 그들의 깊은 호흡과 쏟아지는 땀과 붉게 오르는 열기에서 생명의 거친 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말 새벽 모임에 나간 지 몇 번. 이제 제법 "안녕하세요" 소리도 할 수 있게 되었다(나로서는 사회성에 폭죽이 터진 것이다)

처음엔 최대한 인사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하늘만 보고 있었고, 두어 번 나가고 나서는 상대가 인사를 하면 화들짝 놀라서 '안녕하세요'라고 답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간 것 같지 않고, 서너 번 뛰어본 다음에는 누가 가까이 오면 목례하며 '안녕하세요' 하긴 했지만 그것이 보이고 들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 눈 마주치며 "안녕하세요!" 소리 낸다는 것은 나로서는 '여러분 꽁무니 쫓아가며 뛰는 거 저 정말 좋아요!'의 표현예술인 것이다.


오늘 모임은 (그들이) 그동안 해온 집중훈련을 마무리하는 회복런. 페이스 6분 30초에서 7분 사이로 9km 달리기. 딱 내 페이스에 내가 뛰는 거리였다. 처음으로 자신 있게 공원으로 나갔다.


5시 30분. 새벽은 겨울로 가고 있구나. 쌀쌀한 날씨가 마음에 들었다. 준비운동을 한 뒤 누군가의 "자, 그럼 달려볼까요!"를 신호로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여럿이 뛸 때 내가 겪는 어려움은 나의 리듬을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저마다 제각각인 발소리와 팔치기 동작에 청각 시각이 흔들리며 내 발구름과 호흡을 쉽게 찾지 못한다. 오늘도 그렇게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회원들의 팔다리가 점점 빨라지며 속도가 올라갔다. 시계를 보니 페이스 6분 35초. 그럼 적당한 거 아닌가? 왜 빨라지지? 아니 저기요, 페이스 유지한다고 했잖아요! 회복런이라면서요!

배신감과 당혹감과 호흡곤란에 허덕이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분이 옆으로 와 물으셨다. "지금 속도가 너무 빠르진 않아요?" "네, 헉헉, 빨라요, 헉헉" "그럼 천천히 뛰어요. 쫓아가지 말아요."


오늘만큼은 무리에서 함께 뛰고 싶었지만 그 상태로 9km를 뛰는 건 너무 꼴사나울 것 같기도 하고 말 걸어주신 분의 달리는 자세가 단정하고 목소리는 안정적이며 전체적인 분위기가 신사적이어서 속도를 늦춰 천천히 달리기로 했다.


나란히 뛰던 신사가 슬쩍 뒤로 빠졌다. 한쪽 무릎에 보호대를 하고 계시던데 이제 그만 뛰시려나 보네, 나는 또 혼자네, 했는데 다시 속도를 내 옆으로 오셨다.

"팔치기는 뒤로 밀어야 추진력이 생깁니다. 보시겠어요? 이렇게요. 그런데 지금 팔을 앞으로 올리고 있어요. 팔을 조금 내리고 뒤로 쳐보세요."

"아"

"네, 좋아요. 그겁니다.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앞으로 올리면 에너지 소모만 많아지고 추진력에는 도움이 안 돼요. 팔치기는 습관이니까 달리면서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계속 살피다 보면 자세를 고칠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리고 오른쪽 발이 바깥쪽으로 벌어져요. 양발이 평행하게 땅을 디뎌야 해요. 왼발은 괜찮습니다. 오른쪽 발목을 돌려서 뛴다거나 골반 자체가 열려있을 수도 있어요. 아마 걸을 때도 그럴 거예요. 이런 경우는 평소 걸을 때 양쪽 발로 한 줄 위를 걷는다고 의식하면 금방 고칠 수 있습니다. 괜찮아요. 신경 쓰고 노력하면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자, 의식하고 뛰어보세요."

"아"

"네, 좋습니다. 좋아요. 팔도 발도 아까보다 훨씬 좋네요. 상체 자세는 좋아요. 케이던스도 좋고요. 꾸준히 달리면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원통했다. '감사합니다'조차 할 수 없는 나의 급급한 달리기가 원통했다.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 제 팔이 뒤가 아니라 앞으로 나가고 있었군요! 어쩐지 달리기 끝무렵에는 얼굴까지 올라오더라고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제 오른발이 바깥으로 벌어진다니, 정말 모르고 있었어요! 그동안 달릴 때 왜 자꾸 오른쪽 발꿈치가 왼쪽 다리를 건드릴까 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상체를 이렇게 하면 되는 건지 항상 궁금했어요.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상가 유리창으로 보고 싶어도 달리다 보면 너무 빨리 지나가고.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꾸준히 달리면 제가 어떤 러너가 될지 궁금해요.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달리기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어요. 설레면서,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으면서요. 그런데 신사님은 얼마나 오래 달리셨어요?'

이런 말들을 나누고 싶었다. 깔딱깔딱 숨이 넘어가지 않았다면.


"감사했습니다"

달리기를 마친 뒤, 혹시나 못 보고 못 들으실까 싶어 고개를 꾸벅 숙이며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웃으며 한 손을 들어 올리신 걸 보면 잘 전달된 것 같다. 오늘도 달리기를 해서 행복했다. 내일도 또 달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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