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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Oct 06. 2023

(D-9) AI와 달리기



대청호 마라톤 D-9


지난 이틀을 뛰지 못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한 시간 가까이 땀 흘리고 숨 몰아쉬어가며 힘써 몸을 움직여야 하는 달리기. 그렇게 기운 빼지 않고 새벽잠도 더 잔다면 남은 하루가 힘차야 할 텐데 이거 정말 미스터리다. 달리지 않은 날은 오히려 더 잠이 쏟아지고 몸이 흘러내리는 것 같고 다리도 무겁다. 

이틀을 연달아 뛰지 못한 어제,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더니 오후가 되자 양쪽 다리가 뻗뻗해지고 양볼은 핼쑥해지고 두 눈은 쑥. 가까스로 남은 정신을 붙잡으며 중얼거린 말, "달려야 산다."


계절이 겨울에 가까워지면서 밤은 깊어지고 새벽녘은 차졌다. 포근한 이부자리 속에서 커다랗고 보드라운 강아지 인형 순우피를 끌어안고 자다 보면 새벽 알람이 울려도 일어나기가 싫다. 달리기를 좋아하지만 이맘때의 새벽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는 건 정말 인간미 떨어지는, 로봇 같은 일이다. 


인간미가 있어서 오늘 새벽, 울리는 알람을 끄고 순우피를 끌어안은 다음 더 잤다. 하지만 아주 인간적이지는 못해서 푹 잔 것도 아니고 안 잔 것도 아닌 만큼만 누워있다 일어나 결국 30분밖에 달리지 못했다. 

평소의 절반 정도만 뛰고는 달리기 시계의 정지 버튼을 누르면서 이상한 쾌감이 들었다. "이봐, 시계 친구. 내가 여기서 멈출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자네는 내가 오늘도 7km를 뛸 거라 생각했겠지. 미안하지만 친구, 난 나야(웩). 내가 뛰고 싶을 때, 내가 정한 만큼 뛴다고."


궁금해졌다. 내 달리기 시계가 버전이 높아서 나를 더 정확히 측정한다면 내가 여기서 멈출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내 맥박, 혈류 속도, 피의 농도, 피부의 건조한 정도, 모공의 변화, 호흡량, 동공 크기, 시선 처리, 뇌의 부위별 활성화 같은 것들을 측정해 내가 내릴 결정을 나보다 먼저 알 수도 있을까? 


시계가 챗GPT처럼 대형언어모델로 구성되어 달리기와 바이오와 자본주의와 편향정치와 나-이우주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학습해 나의 모든 달리기에 최적의 솔루션을 정해놓는 시대가 오는 건 아닐까? 그럼 어떻게 되는 걸까. 지금처럼 설렐 수 있을까? 내일 새벽의 달리기는 또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하며 잠에 들 수 있을까? 헥헥거리며 달리는 와중에도 말이 되든 안 되든, 논리성 따위 내던지고 내 맘대로 오만 생각에 빠져들 수 있을까? 감상적이어도 되는 걸까? 달리다 보면 달릴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고 자연을 경외하고 온 인류를 사랑하는 데까지 주책이 뻗치는데 AI가 나를 이성의 정상궤도로 끌고 가지 않으려나? 내가 나로 뛸 수 있게 그냥 두어주려나?


잠깐. 혹시. 이거. 이미 시작된 거... 아니야? 

가만, 시계 어플에 나 매일 달린 루트 다 기록되고 있잖아. 매일매일 알맞은 달리기 제시해 주잖아. 몇 시간 쉬어야 되는지까지 말해주잖아. 클럽에 가입된 동호회 회원끼리 서로가 언제 어디를 얼마큼 어떤 컨디션으로 달렸는지 다 볼 수 있잖아!


직립인간의 근본이고 쉬운 동작의 반복이자 아날로그여서 좋아했는데, 달리기. 

나 좀 무서워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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