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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Oct 10. 2023

(D-5) 경위서



대청호 마라톤 D-5


주저앉게 된 경위는 이렇다. 

수월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났고 차가운 새벽공기를 기분 좋게 들이마시며 달리기를 시작했다. 

이번 주 일요일이 마라톤 대회. 정말 코앞이네, 실감하며 남은 5일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해 보았다. 평일엔 7km씩 뛰자. 토요일엔 뛰지 말까? 5km 정도만 뛰면서 몸을 풀까? 그런데 어쩌다 마라톤 대회까지 신청하게 된 거지?


순식간이었다. 싱가포르의 수십 장면이 덮쳐왔다.  

회사를 대표해 몇 달간 준비해 온 프로젝트를 잘 마쳐야 한다는 중압. 폐쇄된 비행기, 화려한 마천루 야경, 번쩍이는 네온사인, 전 세계에서 몰려든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요란, 출력 높은 연주와 노랫소리가 온 신경세포를 비틀어 꼬집는 긴장. 


6년 전 첫 방문부터 싱가포르는 나에게 공황발작 충격기다. 올여름 역시 그랬다. 숙소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커튼을 치고 약을 삼켰다. 작은 침대에 엎드려 소리를 지른 것도 같고 삼킨 것도 같은데 어쨌거나 그 거친 소리를 만든 것은 통증과 통한이었다.

약 기운이 돌고 성질부릴 기력도 떨어지니 서글픈 감정이 밀려왔다. 땅 딛고 서는 게 이리 힘든가, 내 몫 해내는 게 이렇게 어려운가, 할 줄 아는 게 뭐란 말인가, 밥값도 못하고 사람 노릇도 못하고, 정말 젠장이네...


달리기를 시작한 지 2주쯤 되었을 때였고 2.4km 정도를 바듯이 뛸 때였다. 달리고 나면 심장이 빽빽하게 비틀린 통증이 풀릴 것 같았다. 캄캄한 새벽, 낯선 강변으로 내려갔다. 멀쩡하지 못해 나에게 밤새 구박받던 나는 오른발을 들어 땅을 밟았고 왼발을 이어 들어 땅을 굴렀다. 고개는 들지 못했지만 천천히 두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고 조금씩 조금씩 속도를 내 리듬을 만들었다. 그렇게 나의 달리기를 시작했다. 

3.2km를 달렸다. 숙소로 돌아와 마라톤 대회에 신청했다. 


다시 오늘, 달리고 있던 나를 그 때의 공포가 다시 덮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두 발이, 시공간이 멈췄다. 더 이상 뛸 수 없다는 것은 다행히 인지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 수 없어 몹시 당황스러웠다. 평일이면 늘 뛰던 길이었고 3년 전 살았던 곳 바로 앞이었다. 그저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가면 됐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시 통증이, 통한이 차올랐다. 벗겨내고 싶었다. 아직도 이런 것들로 가득 찬 나를 다 벗겨버리고 싶었다. 생명 다한 것처럼 보였던 고목이 갈라진 수피를 벗고 다시 봄을, 여름을 사는 것처럼 슬프고 서글프고 아프고 원통한 것들 다 벗어버리고 새롭게. 


2.89km. 

간 길만 있고 돌아온 길은 없는 달리기. 

내일도, 모레도 달리지 못하면 어쩌지. 

마라톤 대회, 사람도 많고 소리도 클 텐데 나 괜찮을까. 

왜 그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까.

그냥, 달리는 게 좋아서, 그것만 좋아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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