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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Oct 12. 2023

(D-3) 하이파이브



대청호 마라톤 D-3


오늘은 알람이 울린 순간 확신했다. '나 뛸 수 있어.' 

사흘만인가, 나흘만인가. 얼마나 반가운 확신이었는지. 달릴 수 있다는 작은 마음 하나가 몹시 소중했다. 


뛰지 못한 사나흘 사이에 새벽 공기가 많이 차가워졌다. 하늘은 지금까지 봐 온 빛깔 중 가장 짙고 깊게 캄캄했다. 시야에 넉넉히 차는 별들이 도드라지게 반짝였고 어릴 적 겨울밤마다 한없이 올려보던 오리온 별자리가 단정하고 씩씩하게 자리 잡고 있어 마음 놓였다. 


탈탈탈탈 몸을 털며 종종종종 작게 뛰어보았다. 괜찮았다. 공황발작 이후 쫄보러너가 되어 포기했던 모든 거리만큼 달리고 싶었지만 마라톤 대회를 3일 앞두고 몸에 나쁜 짓 하지 말자 싶어 7km만 뛰기로 했다. 준비, 출발!


거, 참. 

역시 안 뛴 티가 났다. 8분 10초? 9분 1초? 페이스가 말도 못 하게 떨어졌다. 이러다가는 늘 나오던 평균 6분 40초대 페이스도 무너질 것 같아 속도를 높였다가 다시 제 속도로 돌아왔다. 오늘은 무사히 달리기를 마쳐야 하니까.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시야를 가리던 높은 건물 대신 나무 위로 더 큰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유난히 크고 희게 반짝이는 별 아래 살짝 누운 달이 있었다. 얇고 노란 그믐달이었다. 

달려 나갈수록 달이 내 앞으로 미끄러져왔다. 마치 달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그곳으로 뛰어가는 기분이었다. 다소 동화 같은 상상이지만 달과 나뿐인 새벽녘, 눈을 맞추며 달리다 보면 그보다 더한 상상도 하게 될걸. 그나마 내가 송곳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로봇인간이니 이 정도 감상으로 달린 거지. 


이틀 전이었던가, 2.9km도 달리지 못했을 때 공황발작이 왔고 내리 마음고생을 했다. 오늘은 잘 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달리기 시계가 2km 주파를 진동으로 알려왔을 때부터 긴장되기 시작했다. 조금 더 달린 후 이쯤이면 2km 후반까지 왔겠다 싶어 지면서 숨이 차고 다리가 무겁고 무엇보다 그만 뛰고 싶어졌다. 멈추고 싶은 유혹이 최고조에 달할 때쯤 시계가 3km를 알렸다. 됐어. 고비를 넘겼어. 이제 계속 달리기만 하면 돼. 


마음속으로 정해놓은 반환점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있는 달을 향해 슬쩍 오른팔을 들었다. 하이파이브. 흠, 어딘가 좀 아쉬운데? 주변을 재빠르게 둘러본 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두 팔을 높이 쭉 뻗었다. 양손 하이파이브! 좋았어! 같이 달려줘서 고마웠어. 내일도 씩씩하게 달려볼게. 할 수 있을 거 같아!



p.s 미처 몰랐는데, 나 오늘 고개 들고 달렸다. 쫄보처럼 발만 보지 않고(<D-7> 편), 고개를 든 채 7km를 달렸다. 왜? 어제가 정말 생일이었나? (<D-4> 편)

매일 뛰던 길이 나무터널이었다는 걸 60여 일 만에 알게 되었다. 아름다웠다. 나란한 나무들이 아름다워서, 30도, 그 작은 각도만큼 눈을 들어 올린 내가 어여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음이 두근두근,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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