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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Aug 17. 2023

(D-62) 파이팅





밖에서 달릴 때 좋은 점 중 하나는 상가를 지나치면서 유리에 비치는 나의 달리기 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는 상가고 뭐고 고개를 돌릴 여유가 없었고, 몇 번 달리고 나서야 슬쩍슬쩍 옆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뛰는 게 맞나 답답했던 차에 우연히 고개를 돌렸다가 정육점 전면 창에 비친 나를 보게 되었다. 아우, 깜짝이야. 저게 뭐야!


내가 생각했던 나의 폼은 대략 이랬다. 상체는 앞으로 약간 기울고, 뒤로 뻗은 다리와 머리는 대각선으로 직선을 이루고, 팔은 여유 있게 90도쯤 굽혀있는 그런 아름다운 러너. 

정육점 유리창에 있는 나는 대충 이랬는데, 전면을 향해 달린 다기보다는 어중간하게 서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았고, 다리는 뒤로 뻗어지지도 않았으며, 머리만 앞으로 쑥 나와있는 외계인. 참 나...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나니 몇 년 전 수영장이 떠올랐다. 

  내 인생에 접영이라니! 물이 무서워 발가락도 안 담그고 살던 30년 삶을 뒤로하고 접영에 성공했을 때의 기똥찼던 환희를 똑똑히 기억한다. 물개처럼 부드럽고 깊게 잠수. 두 발로 힘껏 물을 쳐내며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른 뒤 양팔 크게 돌려 다시 잠수! 캬! 이것은 중력을 이겨낸 인간 승리요, 우주 조화의 미美를 육화 하는 인체의 신비로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 마스터 반 회원에게 내가 접영 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편도로만 가볼 것을... 과도한 자신감에 왕복 접영을 한 뒤 받아 본 휴대폰에는 맙소사. 수면에서 깔짝짤짝 고개만 넣었다 빼는 희한한 동영상이 담겨 있었다. 아, 마스터 회원님, 그 시간이면 회원님께서는 왕복 4번은 오가며 몸 푸셨을 텐데 귀한 시간 뺏어 죄송합니다, 그래도 웃긴 거 보셨으니까 마음 푸세요. 


첫 책 <네, 면서기입니다> 어느 꼭지에 이런 글을 썼다.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누군가가 지금이 나에게 +인지 -인지 말해주면 좋겠다고. 앞 뒤 옆 못 보고 착각에 빠져 굴러가고 있는 내게 잘하고 있다고 혹은 조금 더 분발해 보자고 누군가 얘기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지. 

그랬다면 6년 전 회사생활을 성실히 하고 있다고 착각해 몸과 마음을 통째로 갈아 넣는 실수 따위 하지 않았겠지. 우울증도 공황장애도 광장공포증도 사회불안증도 달라붙지 않았겠지. 기약도 없이 매일 밤 약을 삼켜야 하는 패배감 없이 살아가가겠지.


식구들에게도 낯을 가리는 내가 마라톤 동호회 카페에 가입했다. 잘못된 자세가 달라붙기 전에 낯선 이들에게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와 -를 물어보려 한다. 혼자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기 전에. 외계인으로 오해받아 납치되기 전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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