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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smilewriter Jun 05. 2024

보이스 16

엄마와 딸


"엄마, 배고파. 밥 안 줘? 엄마 12시에 시내에서 약속 있다며? 나 아점 안 챙겨주고 갈 거야?"
"알았어. 이제 만들게. 조금만 기다려."
"밥 뭐야?"
"그냥 김치찌개 해서 먹어."
"또?"
"반찬 투정하지 말고 그냥 주는 대로 먹어."
"그냥 스팸이나 구워주라. 김치찌개 지겨워."
"너의 할머니가 해준 김치 빨리 먹어야 해서 어쩔 수 없어. 평소 잘 먹더니 오늘따라 왜 저래? 주면 잘 먹을 거면서."
"지겹단 말이야."
"알았어. 스팸을 달걀 입혀서 구워줄게. 김치찌개에도 돼지고기 말고 스팸 넣을까?"
"응, 좋아."
딸과 겨우 합의를 보고 아진이의 아침 겸 점심 준비를 하러 부엌에 간다. 김치를 썰어 냄비에 넣고 아진이가 좋아하는 스팸을 듬뿍 넣는다. 묵은지라 김치찌개 할 때 다른 걸 안 넣어도 먹을 만하다. 찌개가 끓기 시작하자 채소를 씻고 드레싱소스를 얹었다. 멸치볶음, 고구마 줄기, 김치, 김, 고등어 반토막을 식탁 위에 두었다. 마지막으로 밥과 찌개를 퍼서 식탁 위에 두고 아진이를 불렀다.
"아진아, 밥 먹어."
"응"
"엄마, 지금 씻고 바로 나갈 준비 해야 해. 저녁에는 돌아올 거야. 너 오늘 000해야 한다고 했지? 잘 다녀와"
"응. 걱정하지 말고 재미있게 잘 놀다 와."
욕실에서 씻고 바로 화장대에서 머리를 말렸다. 드라이기도 말리면서 컬을 줄 수 있는 고데기의 전원을 미리 켰다. 화장대에서 스킨과 에센스로 화장을 시작했다. 아라는 온도가 180도로 올라온 고데기를 들고 컬을 만들면서 오래간만에 가는 시내인데 뭘 입을까 고민했다. 컬을 다 만든 후 화장을 했다. 옷은 두 벌 정도가 후보였는데, 겉옷을 입어보고 하나를 결정했다. 다른 옷은 살짝 뚱뚱해 보였기 때문이다. 둘 다 잠겨지긴 하지만 하나는 배부분이 살짝 들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라는 작년보다 7킬로가 쪘기에, 옷이 대부분 맞지 않아서 최근 스트레스가 많았다. 아라의 옷 고르는 기준은 하나이다. 조금이라도 덜 뚱뚱해 보이는 옷이어야 한다. 귀걸이와 목걸이, 반지를 끼고 아진이의 방 앞에서 외쳤다.
"아진아, 엄마 나간다."
"응, 잘 다녀와요."
고민한다. 시내는 주차가 어려운데, 택시를 탈지 아니면 지하철을 탈지 고민하던 아라는 지하철로 결정했다.
교보에서 10분쯤 지나 도착했다. 아라는 카카오톡에서 정했던 한 자리에서 10분간 있기를 어기고 그들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1층을 둘러보니 지인들이 안 보여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의 구석구석을 돌아봤으나, 보이지 않는다. 3층으로 올라갔다. 이쪽으로 오고 있던 두 사람을 만나 인사를 했다.
아라에게는 직접 서점에서 기다린 경험보다는 서점에서 기다리고 있는 장면을 눈앞에 그리다 보니 옛 추억이 떠오른 점이 인상적인 일이었다. 3명이 함께 점심 먹을 곳 바로 앞에 전시관이 있었다. 000 작가의 000 책 관련 전시관이었다.
아마 그 작가의 000을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교 시절에 읽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감동으로 가득한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었다. 뭐에 대한 감동이었는지,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 다시 읽어봐야지 생각했지만, 그 뒤로 한 번도 읽지 못했다. 아라는 무엇이 다시 읽는 행위를 막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시간이 없어서? 물론 시간이 많은 건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니지. 다른 책도 읽고 블로그에 리뷰도 쓰잖아. 영화 보고 놀러 갈 시간은 있으니 시간 없다는 건 이유가 되지 못해. 그렇다면 뭔가가 두려워서?'
스스로에게 한 질문에 화들짝 놀랐다. 아라는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부끄러움을 느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놓고 안 읽은 가장 큰 이유이다.
'난 무엇이 무섭고 두려웠던 것일까?'
본인의 뇌 속에 파고들 정도로 생각에 잠겨있던 아라는 잠시 후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어릴 적 느꼈던 감동이 지금 읽고 난 후 환상이었다거나, 전혀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거나 하는 게 무서웠던 거야. 영원히 내 마음속에 감동을 준 존재로만 기억하고 싶지, 실망이라는 감정으로 좋은 추억과 감동을 덮어버리고 싶지 않아.'
10대의 아라는 작가라는 존재, 책이라는 존재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작가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책이 있는 한 끊임없이 다양한 세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 난 책들로 가득한 집에서 평생을 책만 읽으며 살아가면 좋겠어. 학교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도 책 읽을 시간을 뺐는 것 같아 너무 싫어.'
10대 때 본인이 했었던 생각들을 떠올리고는 당황했다. 지금은 책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책은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모든 것이 다 깨어진다 해도 순수해도 심각하게 순수했던 본인의 어린 시절의 감정, 생각, 감각들만큼은 스스로 지켜주고 싶었다. 그 시절의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당시 했던 환상과 같은 생각을 덜 깨지도록 돕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아라는 갑자기 드는 그리움에 울컥한다. 뭔가가 끊임없이 그리워진다. 함께 갔던 이들에게 이런 감정을 드러낼 순 없다. 본인의 마음을 밀어내고 바로 근처에 있는 커피숍으로 갔다. 처음 한옥 카페로 갔으나 항상 인기가 많은 이곳은 역시 오늘도 자리가 없다. 할 수 없이 근처에 있는 다른 카페에 갔다. 거기서 2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이 너무나 그리워진 아라는 그 그리움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각만 하고 있다. 아라의 생각을 깨기라도 한 듯 지인들은 본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 가족 이야기, 학창 시절 이야기, 지금 본인들의 생활 이야기 등을 이어갔다.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기에 어린 시절의 자신이 그립고 울컥하던 마음이 조금씩 옅어졌다. 아라는 그들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 기울였다. 고개도 끄덕이고 반응도 하면서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함께 떠다녔다. 마음이 편안해졌고 안정되었다. 친근하고 마음 편한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즐겁다. 아라는 인사하고 돌아오면서 생각한다. 앞으로의 그들과 미래의 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오늘이라는 시간에 인사하고 헤어졌다.
"우리 또 언제 봐요? 저녁에 나 약속 있는데, 시간 괜찮으면 같이 볼래요? 00이랑 만나는 데, 둘 다 00 알잖아요? 같이 봅시다."
"아라 언니, 옥이 씨랑 같이 갈래요?"
"오늘 저 다른 데 가야 해서 안 되겠어요. 즐겁게 보내세요. 우리 20분만 더 얘기 나누다 가요."
"너무 아쉬워요.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 같아요."
"그러게요. 우리 다음에 봐요. 다음번엔 내가 밥 살게요."
"서로 산다니 좋네요. 그럼 전 몸만 가면 되는 건가요?"
"그래요."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라는 인사를 하고 지하철 내 지하상가로 갔다. 아라는 스트레스 쌓이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 습관처럼 지하상가나 근처 옷, 소품 가게에 간다. 지하상가에는 옷, 액세서리, 화장품 등을 파는 쇼핑몰이 있다. 거기서 티셔츠 한 장을 사거나 양말 하나만 사도 기분이 좋아진다. 아라의 엄마는 아라의 마음을 몰라주고 1주일에 한 번 아라집에 들러 새로운 옷이나 소품 등이 보이면 야단친다.
"넌 어떻게 된 아이가 매일 쇼핑이니? 있는 옷이나 다 입어. 옷에 뭐 그렇게 욕심을 많이 부려? 그리고 옷 좀 괜찮은 거 사든가. 1개를 사더라도 제대로 된 거 사라. 싼 거 열 벌이 무슨 소용 있겠니? 좋은 거 한 벌 사서 오래오래 입는 게 돈 아끼는 거다. 하도 많이 사서 집에 있는 옷 다 입지도 못하고 그냥 죽겠다. 애가 왜 이렇게 사는 걸 좋아해?"
"엄마, 내가 알아서 할게. 난 옷이 빨리 지루해지는 스타일이야. 한 옷 오래 입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내 스타일은 내가 잘 알아.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두면 돼요."
그 뒤로 10분간은 엄마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라는 그 순간만 모면하기 위해 건성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 장면을 아진이가 보고 있다. 분명 저 순간은 아진이의 엄마와 외할머니만 있는 공간이고 과거인데 아진이는 갑자기 두려워진다. 이게 뭐지? 분명 엄마와 외할머니인데, 나 지금 죽은 거야? 좀 전에는 엄마가 지인과 만나 젊은 시절 미팅 같은 거 안 해본 것 아쉬워하던 장면이더니 지금은 왜 엄마랑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몇십 년 전 모습이 보이는 거야?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어디에 있는 거야? 나라는 존재는 잠을 자거나 죽어있고 뇌만 살아서 시공간을 넘나들고 있는 건가? 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무서워. 너무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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