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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smilewriter May 29. 2024

보이스 15

서점에서 서로 만나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엄마의 폰으로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내일 12시에 시간 돼요? ㅇㅇ씨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기 전 언니랑 제가 일 년 동안 잘 도와줘서 고맙다고 밥 사준다네요.'
수아가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아라는 내일이 무슨 요일인지 잠시 생각한다. 내일 특별한 일이 있는지 휴대전화를 꺼내 일정표를 확인한다. 별다른 일은 없다.
'우리 둘에게?'
'네. 언니 시간 되나요? 언니 내일 안되면 되는 날로'
'내일 12시 가능해. 아님 금요일 점심도 가능해.'
'언니 내일 12시에 봐요. 교보문고에서 보자네요. 거기서 봐요.'
'응, 알았어.'
오랜만에 시내 서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전날 마신 술 때문인지 일어나는 게 힘들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아라는 11시에는 출발해야 하니 그전에 삼십 분이라도 헬스장 가서 걷고 거기서 씻고 시내 갈지 고민한다. 아라는 갑자기 귀찮아져서 1시간 더 누워있는 걸로 결정했다. 잠을 더 잘지 했는데, 아라는 서점이라는 단어에서 계속 머무른다. 그러더니 옛날 기억을 소환했다.

예전 대구에는 젊은이들의 약속 장소 몇 군데가 있었다. 대구 백화점 정문 또는 남문, 제일서적, 대구백화점 앞 광장 시계탑, 대명동 계대 돌계단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시내에 나가면 난 대구백화점이나 제일서적에서 많이 만났다. 정확하게 시간을 못 지키는 이가 한두 명 있어도 쇼핑하고 있거나 책을 보고 있으면 되었다. 대학교 들어가서는 시내에 잘 안 가게 되어 대학 친구들과 대학 안 건물에서 많이 약속을 정해 만났지만, 오래된 친구들과 동성로에서 약속 있을 때는 대구백화점과 제일서적 두 군데를 자주 갔다.

제일 서적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나와 약속 있던 그 누군가가 나타났다. 만나는 상대에 따라 서점에서 책을 보고 있는 나의 마음도 달라진다. 어떤 때는 책을 보고 있으나 머릿속에 하나도 안 들어올 때가 있고, 어떤 때에는 상대방이 많이 늦어도 책 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를 때도 있었다. 반대로 상대가 먼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도 많다. 서점 안에서 상대를 발견하고 걸어가면서 내가 왔다는 표시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뒤에서 깜짝 놀라게 할지, 그냥 인사하고 만날지, 모르는 척 바로 옆에서 책을 읽을지 등 생각했었다. 서로를 발견한 후 가볍게 미소 짓던 우리가 기억나는 제일 서적이다. 지금은 대구백화점과 제일서적 둘 다 사라졌다. 어린 시절 내내 중요한 장소였던 곳이 이제는 없다니 상상이 잘되지 않는다. 내 아는 직장 동료는 대구백화점 정문에서 친구 기다리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로 했다는데, 대구에 사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추억이 있던 장소가 이제는 없다.
대구에서 오래된 유명 서점들은 거의 다 사라지고 대형 서점인 교보문고가 대세가 되었다. 교보문고에서 만난다고 하니 어린 시절 누군가를 기다리던 서점에서의 모습들이 생각나 정겨웠다.
단체 카카오톡에 내일 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었다.
'내일 12시 교보문고 어디에서 만날까요?'
'교보문고 본인이 좋아하는 책이나 코너 앞에 서있는 게 어떨까요?'
'그렇담 우리 못 만나는 거 아닌가요? 흐흐흐'
'사람마다 각자 좋아하는 책 종류가 다를 텐데.'
'좋아요. 그런데 서로 영원히 못 만나면 어떻게 하나요?'
'한번 해봐요.'
'12시 정각에 사람들이 안 보이면 찾아다닐 겁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다음처럼 해보는 게 어때요?'라고 옥이 씨가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12시 교보문고서 예전 감성으로 숨바꼭질!
자기가 좋아하는 코너에 있기
10분 단위로 3번 움직이기
12시에 1곳
12시 10분에 2번째
12시 30분에 3번째
서로 찾아다니기 없기
자기 좋아하는 곳에서 우아하게 책 읽기.
어때요?'
'좋아요.'
'난 그냥 찾으러 다닐껴'
'서로 찾아다니기 없기'
'답답해 못살아. 난 전형적인 이과형이라. 찾으러 다닐 것임.'
3명의 대화가 재미있다. 이런 옛날 감성 즐거워서 웃음이 나왔다.
'내일 봐요. 우리 미팅 상대방 찾는 것 같은 미션 받은 겨? 재미있네요. 우리가 서로를 만나려면 30분은 걸릴 듯'
아라는 마지막으로 답장을 보냈다. 아라는 미팅이라는 단어를 스스로 꺼내놓고 그 단어에 대해 생각해 봤다. 아라는 중고등학교 시절 미팅 한번 해본 적이 없다. 반팅 시켜주겠다는 공약을 건 실장 후보가 최종적으로 실장이 되고 그 아이가 공약을 지키겠다고 반팅 잡았다며 같이 가자고 명단을 작성했다.
"아라야, 너 미팅해 봤어?"
"아니."
"그럼 이번에 반팅 한번 해봐. 재미있을 거야. 00고 1학년인데 잘생긴 애들 몇 명 있단다. 그냥 가서 슬쩍 앉아 있다 미팅 분위기만 느껴도 좋을 거야. 같이 가자."
"미안해. 난 안 할래."
"그러지 말고 반팅같이 하자."
"진짜 미안해. 난 안 하고 싶어."
아라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미팅이나 반팅 이런 개념 자체가 낯설기도 했고 모르는 사람과 어색하게 이성적인 만남을 갖는다는 게 뭔가 부끄러웠다. 사춘기라 호기심도 들었지만, 아라에게는 부끄러움이 더 컸다.
아라 반 친구들은 반팅에 다녀왔고 별거 없었다면서도 그날 있었던 일, 상대방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이야기한다고 교실이 하루 종일 떠들썩했다. 그 뒤로도 매년 당선된 실장이 반팅 하자는 말을 했지만 항상 아라는 거절했다.
"아라야, 00고 0반 아이들이 10명 온다는 데 우리는 지금 8명밖에 참가 안 해. 너 지금까지 가자 했는데, 계속 안 갔잖아. 이번만 좀 참석해 주라. 제발."
"난 미팅이나 반팅안하고 싶어. 미안해. 다른 애 꾀어 봐."
"제발 같이 가. 자리에 잠깐만 앉아 있어 주면 안 되니?"라고 실장은 부탁했지만 아라는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라는 한 번쯤은 나갈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결국 미팅 한 번도 안 하게 될 줄 몰랐기 때문이다. 혹시 모를 인연이 반팅이나 미팅에 있었을지 모르지 않는가? 그때 반팅했다면 만났을 상대 아이랑 서로 좋아하게 되었거나 결혼하게 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 그 순간만 할 수 있는 일을 나는 왜 하지 않았을까? 일탈이라고 느껴져서일까? 나쁜 사람 만날까 봐 두려웠던 것일까?'
아라는 생각을 이어갔다.
'10대 때의 나는 두려움이 많았나 봐. 그때만 할 수 있었던 일은 그때 해 봤어야 하는데. 나쁜 사람 만난다 해도 내가 나쁜 사람임을 금방 알아보고 거절하지 않았을까? 상대방도 그냥 평범한 남학생들이었을 텐데.'
아라는 작은 방에 가서 중고등학교 시절 본인의 사진이 들어있는 사진 앨범을 꺼냈다. 한 장 한 장씩 넘기며 당시 자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어리숙해 보이잖아. 아주 평범한 외모에 책에 빠져 사는 듯한 모범생 스타일이네. 범생이, 답답한 스타일의 표본이네. 반팅이나 미팅 갔을 때 인기가 제일 없었을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무서웠던 것일까?'
당시 미팅 같은 거 나가서 외모나 스타일 때문에 상대에게 까여도 보고 이런저런 경험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한숨을 쉰다. 그 뒤로도 아라는 남녀 간의 의식적인 만남 즉 선이라는 것도 한 번도 보지 않고 대학교 때 만난 남편과 결혼했다. 서점에서 다양한 미션을 주는 지인 덕분에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린 아라는 아진이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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