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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smilewriter Jul 10. 2024

보이스 노트 21

검정 비닐봉지

그 다음날 집에 돌아온 춘재는 영철을 보고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영철은 아빠가 집에 들어온 순간 예상했다. 춘재는 온몸이 멍투성이인 상태에 오른쪽 손을 접은 채 펴지 못했고 왼발은 심하게 절룩거리며 들어왔다. 그들이 나를 보내주고 아빠를 대신 때렸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간의 묘한 눈빛이 오갔지만, 서로에게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부자는 엄마에게 비밀이 생긴 것이다. 영철은 결심한다. 이제는 평범하게 살리라고. 평범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소중한지 알았기 때문에 그 뒤로 학교도 다시 가고 평범하게 살려고 했다. 하지만 아빠는 점점 이상해졌다. 두려움에 자다가도 눈을 부릅뜨며 일어나서 서성이고, 불안한 눈빛으로 하루 종일 지냈다. 그리고 외출하는 날이 잦아졌다. 영철이가 가출한 한 달 동안 사정이 있어 가게 문을 닫는다는 종이를 붙여놓았는데, 돌아와서도 그 종이는 자주 붙여져 있었다. 춘재는 외출할 때면 보미나 영철에게 카운트 좀 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1시간 정도만 나갔던 춘재가 어떤 날은 3, 4시간 나갈 때도 많다. 아빠에게 궁금한 게 많았지만, 영철은 무서워 묻지 않았다. 보미도 춘재가 그날 이후 달라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영철이가 돌아온 기쁨에 남편의 변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춘재는 아들 영철이 돌아온 이후부터 맞은 몸 추스를 새도 없이 그들의 하위 조직원이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 슈퍼마켓에 오는 손님 중에 숨겨둔 돈이 많을 것 같은 사람에 대한 개인 정보를 빼내라는 지시를 내려왔다. 춘재는 개인 전화번호, 주민증, 사는 곳, 집 앞 택배의 종류, 식구들, 옷이나 신발, 가방 등의 브랜드명, 슈퍼에 오면 주로 뭐를 사는지 등을 기록해 주었다. 어느 날 슈퍼에 아라가 들어왔다. 정보를 빨리 안 준다고 조직원이 닦달하기 시작할 때였다. 아라를 보는 순간 다음 타깃으로 정했다. 춘재에게는 사진을 찍는 안경이 있었는데 그 안경으로 아라의 모든 정보를 찍기 시작했다. 아라는 직전까지 본인의 아들과 통화를 했는지 손에 들고 있던 통화 목록에 ‘아들 아진이’가 있었다. 춘재는 아라의 핸드폰에 펼쳐져 있는 아라의 아들 전화번호도 찍었다.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훔쳐야 할 시간이다. 한숨이 나왔다.

‘내가 도둑질까지 하게 된다니!’

아라가 장을 보는 중간 춘재는 그 근처 박스 정리하거나 물건 욺기는 척하면서 아라의 열린 가방에서 슬쩍 지갑을 빼냈다. 자연스럽게 들고 슈퍼 안에 있는 창고에 들어가 아라의 지갑을 열고 주민증과 안에 있던 작은 수첩을 펼쳐 빠른 속도로 찍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지갑 안에 수첩도 들고 다니는구나.’

그때 아라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계산대에 사람이 없으니, 아라는 주인이 있을 법한 창고 근처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급하게 나온 춘재는 뭐가 필요하냐고 묻는다. 아라의 질문에 무뚝뚝하게 손짓으로 위치를 알려주었다. 다음 짐을 정리하듯 아라 근처에 가서 지갑을 열린 가방 안에 원래대로 갖다 놓았다.

‘이 사람은 평소 좀 둔한 성격인가 봐. 지갑을 가져가고 다시 갖다 놓는 것도 모르다니. 가방은 열 채로 다니고 덜렁대는 스타일이네. 아이고 아줌마. 아줌마가 다음 범행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소.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제발 당하지 마시오.’

난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기 암시를 걸었다. 너무 괴로워 죄책감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어디로 오라고 하더니 약간의 교육을 했다. 그 후 바로 보이스피싱범으로 투입되었는데, 하루에 4시간 정도 했다. 창고 같은 곳에 엄청 많은 사람이 춘재처럼 전화하며 보이스피싱 즉 전화금융사기범이 되어 가고 있었다. 조사를 받거나 걸린 사람이 생기면 대타로 춘재는 슈퍼를 보다가도 보미나 영철이에게 맡기고 가서 몇 시간 전화를 해댔다. 그들은 자세한 자료를 건네주며 전화 대화의 설명서대로 읽으면 된다고 했다.

춘재는 시간이 지날수록 양심의 가책이 점점 무뎌지고 습관적으로 이 일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피해자들이 겪을 고통을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지금은 그들이 그냥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그냥 영화나 드라마의 가짜 존재인 것처럼 보였다. 춘재는 자신의 이런 변화가 너무 무서워 화들짝 놀란다. 춘재가 경상도 출신인지 표준어를 잘 사용하지 못하여 설명서를 읽는 것도 잘못하고, 연기력도 안 되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의심해서 신고한다고 소리치거나 전화를 끊는 경우가 많아지자, 조직원들은 춘재에게 더 이상 전화하라고 시키지 않았다.

그들이 다음으로 준 임무는 서울에 가서 돈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영철이와 부인에게는 서울의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하고 올라갔다. 조직원들은 춘재를 도청하고 있으니, 딴짓은 전혀 할 수 없었다. 은행 앞에서 할아버지를 만나 1억을 받았는데 경찰이 있었나 보다. 갑자기 저 멀리 행인으로 보이던 두 사람들이 멀리서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춘재는 아픈 다리를 절뚝거리며 뛰어갔고 춘재를 쫓기 시작했다. 춘재는 급하게 지하로 달리며 가방을 버렸다.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철 역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6명 정도의 노숙인들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가방 안에 넣어둔 검은색 비닐봉지에 든 현금 1억 원을 들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남녀 화장실 앞에서 춘재는 고민했다. 춘재는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다. 다행히 여자 화장실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들 뭐가 그리 바쁜지 지나가는 사람들은 핸드폰을 보거나 딴생각들을 해서 타인의 일에 관심을 두는 사람도 없었다.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으나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춘재는 제일 끝 칸의 마지막 변기 뒤편쪽에 검정 비닐봉지를 숨겼다. 비닐은 변기 위쪽에 쓰레기처럼 두었다. 나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몇 분 앉아 있는 지하철 내 고객 쉼터에 앉아 있었다. 춘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틈에 앉아 있으니 원래 지하철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같이 보였다. 아까 쫓던 경찰이 두리번거리며 찾았으나 춘재를 의심하는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가고 안전할 때까지 한 시간을 거기서 계속 기다렸다. 추웠지만 그쯤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돈만 조직원에게 전달해 주고 이제 춘재는 손을 떼려고 결심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조직원의 우두머리를 찾아가서 영철이와 춘재가 한 일의 대가도 바라지 않고, 어떤 일이 있어도 신고하지 않을 거니 이제 춘재와 영철을 내버려 두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을 살피고 경찰은 없는지 등을 살폈다. 비닐을 넣기 위해 지하철 내에 있는 편의점에서 저렴한 천 가방도 하나 샀다. 사면서도 여자 화장실 쪽을 계속 지켜봤다. 다시 고객 쉼터에 앉았다. 한 시간 동안 많은 여자들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왔다. 춘재는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 누구도 돈 든 비닐을 발견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들이 검은 비닐봉지를 본다고 하더라도 쓰레기를 버리고 간 것처럼 여겨질 만큼 오래 사용한 흔적이 있는 비닐이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안 되었다. 그때였다. 한 여자가 화장실에 들어갔다. 춘재는 1시간 동안 화장실을 왔다 갔던 사람들과는 다른 느낌을 그 여자에게서 받았다.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설마 돈 든 비닐을 발견하진 않으리라 생각하며 화장실을 계속 관찰했다. 불안한 예감이 맞았던 걸까? 화장실에서 나온 여자는 검은색 비닐을 들고 여기저기 사람들에게 물었다. 춘재가 앉아있는 곳까지 왔다. 그녀는 여자 화장실이니 당연히 검은 비닐봉지의 주인은 여자일 것으로 생각하고 고객 쉼터에 앉아 있는 사람 중에 유일한 여자인 할머니한테 물었다.

“할머니, 혹시 이거 두고 가셨어요?”

“아니.”라고 말했다. 모자 사이로 그 여자 얼굴을 바라보는데 놀랬다. 며칠 전 슈퍼마켓에 왔던 바로 그 아라였다. 춘재는 그녀가 본인을 알아볼까 싶어 긴장했지만, 전혀 알지 못했다. 저 여자가 왜 서울까지 왔지? 왜 지금 저걸 들고 놔서 내 일을 방해하는 거야? 저 여자의 정체는 대체 뭐지? 그 여자는 비닐을 들고 안내센터까지 갔다. 저기서 신고하면 끝장인데, 춘재는 그녀에게 다가가 강제로 뺏어 도망가나 생각하고 있는데 다행히 안내소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저 여자는 그냥 있는 자리에 비닐은 그대로 두지 왜 들고 돌아다니는 거야? 지금이라도 그냥 훔쳐 달아나 버릴까? 저 여자는 이상하게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니 저러다가 경찰에 신고까지 할까 봐 무서웠다. 지금 훔칠까’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 여자는 검은색 비닐을 들고 다시 화장실에 들어갔다. 다시 그 여자가 나왔는데, 비닐은 없다. 대신 들어갈 때 없었던 시장바구니 같은 천이 보였다. 천 가방 안에 검은색 비닐봉지를 넣었나 보다. 그녀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한다. 그 여자가 현금으로 지하철 무인 매표소에서 표를 산다. 잔돈으로 받은 동전을 들고 있는 그녀에게 한 노숙인이 가서 돈을 달라고 했다. 그 여자가 그 노숙인과 뭐라고 말하더니. 동전뿐만 아니라 지갑을 꺼내 지폐 몇 장을 꺼내주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천 바구니를 노숙인에게 준다. 이게 무슨 일인가? 노숙인인 그걸 받아 들고 간다. 아라는 지하철을 타러 들어갔다. 춘재는 아라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저 노숙인을 따라가야 한다는 뇌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노숙인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노숙인은 그 돈을 들고 1층으로 올라갔다. 노숙인 바로 뒤에 바짝 붙어갔다. 형언할 수 없는 악취가 풍긴다. 바로 그 지하철역 지상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춘재는 그 노숙인의 입을 막고 팔을 꺾은 후 나무 많은 곳 구석에 끌고 들어갔다.

“읍. 너 뭐야? 너 왜 그래?”

“그거 내놔.”

“미친놈. 노숙자, 거지 것 뺏는 놈이 어딨어. 어떤 여자가 노숙인들 쉼터 관계자에게 주라고 줬어. 책이나 본인이 그 양말 같은 거래. 너 거지야? 겨우 양말 얻으려고 사람을 납치해?”

“시끄러워. 그거 주고 가.”

“아 아까 아줌마한테 꼭 갖다 준다고 약속했는데, 에이씨. 몰라.”

“시끄러워. 당장 꺼져. 처맞기 싫으면 꺼져.”

“그 참 거친 사람이네. 나보다 더 불쌍한 놈이구먼.”

노숙인은 춘재에게 천 바구니를 주고 갔다. 춘제는 편의점에서 산 가방 안에 검은 비닐을 급히 넣고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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