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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인형 Feb 16. 2022

작가님, 파리 풍경 언제 나와요?

[완독 일기 /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 문학동네

내 이럴 줄 알았다.

이 책을 낭만적인 산책 에세이라고 착각하고 읽기 시작한 것이다. 정지돈 작가 책인데 말이다(이거 편견인가?). 하지만 책에는 낭만도 없고 풍경도 없다. 책의 부제는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다. 부제만 보면 얼마나 낭만적인가. 가수 조용필도 부르짖지 않았나.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 곳’. 파리는 말할 것도 없다. 에펠탑만 봐도 페로몬이 분비될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작가는 나를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이끌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따라 걷다가 나 혼자 길을 잃고 ‘작가님, 어디 계세요?’를 외치기를 여러 번. 결국 야단맞고 엄마 뒤를 졸졸 따라가는 아이처럼 조용히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갔다.


그래도 결론적으로 독서는 즐거웠다. 예상한 풍광은 감상하지 못했지만 정지돈이어서 가능한 유머는 나를 피식피식 웃게 만들었다.


플라뇌르의 산책은 흔히 거북이의 속도와 비견된다. 게으르고 느린 구경꾼의 시선, 산업화의 속도를 거부하는 완만한 속도, 그러나 사실 플라뇌르가 거북이 속도로 걷는 이유는 실제로 거북이와 함께 걸었기 때문이다. / 81p     

이런 글을 쓰는데 안 웃을 수 있나?


예술과 철학을 넘나드는 깊은 사유는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어떤 이야기는 많이 어려웠다. 한 챕터를 세 번 읽기도 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는 짧게 메모를 했다. 언젠가 깊이 알아보게 될 날이 있겠지.     

작가는 플라뇌르를 짜증 나는 인간형이자 지겨운 개념(46p)이라고 말한다. ‘도시 산책에 관한 글 역시 억지스럽고 따분하다(46p)'고 말한다. '산업화의 속도를 거부' 하면서도 '상품과 여성을 소비문화로 누리는' 플라뇌르의 이중성에 대한 이야기다. 도시를 걸으며 관찰하는 산책자라는 뜻의 플라뇌르는 여성형인 플라뇌즈로 바뀌어야 한다. 책에 언급된 울프의 걷기는 좋은 예다.


패션에 발터 벤야민을 연결시키고, 움직임과 이동에 밀란 쿤데라를 끌어들인다. 산책의 의미를 말할 때는 걷기에 진심이었던 로베르트 발저의 예를 든다. 그러면서 산책과 글쓰기의 공통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우리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거나 결말을 맺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실한 어느 지점에서, 주제와 의도, 인과와 의무를 망각한 지점에서만 진정한 글쓰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 95p     


경험은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지만 가본 곳, 읽어본 것, 먹어본 것 등 경험한 것은 실재가 되어 머리에 박제된다. 얄팍한 경험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시전 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고르기아스의 말을 빌어 '해도 모르고, 안다 한들 전달하지 못하는 상태가 인간의 한계'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20년쯤 전에 파리를 가봤다. 일주일 출장을 다녀왔는데 너무 바빠서 에펠탑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도 파리를 모른다. '파리, 내가 가봐서 아는데'라고 하기에는 에펠탑을 못 본 것이 걸린다. 에펠탑만 보고 왔으면 아는 척할 수 있었는데.      


그런데 정지돈, 금정연, 오한기 이 세 명의 작가는 혹시 한 사람이 아닐까? 오한기 작가의 소설을 읽었고, 금정연 작가의 책도 읽었고, 게다가 세 명이 동시에 출연한 북토크도 봤는데 자꾸 이 세 명이 섞이는 이유는 뭘까?

작년 겨울, 수능이 끝나고 며칠 후 에버랜드에 갔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멀리 정문을 본 순간 입이 쩍 벌어졌다. 검은색 덩어리가 거기 있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개장을 기다리며 줄을 서 있었다. 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연령대나 풍기는 포스(?)를 보아 수능을 치른 학생들인 듯했다. 롱패딩은 브랜드는 각기 다르겠지만 디자인은 대체로 비슷해 보였다. 

정, 오, 금 3명의 작가가 겹쳐 보이는 건 ’검은색 롱패딩을 입은 30대 아시아인 남성 문학인 3명‘이 떡볶이를 먹는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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