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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인형 Mar 01. 2022

주소는 권력이다

[완독 일기 / 주소 이야기]

주소 이야기 / 민음사

며칠 후면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투표소에 갈 때는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여권 등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가야 한다. 신분증이야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고, 설령 분실했다 하더라도 재발급을 받으면 된다. 하지만 내게 주소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신분증을 만들 수 없을 테고, 투표도 하지 못한다. 은행 계좌를 개설하지도 못하고 학교에 입학하거나 회사에 취직하는 일도 어려울 것이다. 세상에 주소 없는 사람도 있나 싶겠지만 놀랍게도 지구 상에는 주소가 없는 곳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


「주소 이야기」의 첫 장에는 콜카타의 빈민촌에 사는, 주소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콜카타의 체틀라 지역은 구불구불하고 막다른 길이 많은 빈민촌으로 무엇이 길인지 결정하는 것조차 큰 일인 곳이다. 이곳은 위생, 깨끗한 물, 의료 서비스 등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 많지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주소다. 주소가 신원을 증명하는 필수 요소이다 보니 주소가 없는 사람들은 은행 계좌를 개설할 수 없고, 계좌가 없으면 저축을 할 수 없고 대출도 받을 수 없으며 연금도 받을 수 없다. 주소가 없어 빈민가를 벗어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위해 ‘주소 없는 이들에게 주소 만들어 주기 운동’이라는 비정부기구가 활동을 하고 있다.


만국우편연합은 주소 붙여 주기가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빈곤 구제 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주소가 신용거래, 투표권 행사를 용이하게 하고 세계 시장을 활성화시킨다고 설명했다. / 16p


주소는 국가가 국민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징병 군인을 찾아내는 등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1700년대 오스트리아의 왕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국에서 전쟁에 적합한 남자를 모두 파악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정으로 집마다 번호를 매기고, 그곳의 거주자 명단을 작성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1,700명이 전국으로 흩어져 작업을 수행한 결과, 최종적으로 찾아낸 병사는 700만 명에 달했다.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데 주소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나는 도로명이 정체성과 부에 관한 문제이며, ‘소니 카슨 애비뉴’의 경우처럼 인종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것은 대개 권력에 관한 문제다. 이름을 짓고, 역사를 만들고, 누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왜 중요한지를 결정하는 권력 말이다. / 31p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례는 주소가 인종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남아공에서 네덜란드 이민 백인들인 아프리카너스와 남아공 원주민 흑인들의 대립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는 도로명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에 대한 논쟁에서도 나타난다. 흑인들은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과 제도)가 철폐된 후에도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이름을 딴 도로명이 그대로 존재한다며, 이를 흑인 인권을 위해 싸운 영웅들이나 관련 키워드로 된 이름으로 바꾸는 일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아프리카너들은 이전에 누리던 문화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냐며 반대하고 나섰다.

멕시코시티, 크로아티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수단 등 전 세계 혁명 정부들이 집권과 동시에 거리 이름을 바꿨다. 도로명을 개정해서 혁명의 새로운 이념을 알린다는 것이다. 결국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곧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다. 주소가 권력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뉴욕에서는 주소를 거래하는 것이 가능하다. 파크애비뉴 1번지에 있는 건물이 아니더라도 해당 주소지의 건물 주인이 주소를 팔면 그 주소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주소와 실제 위치가 다르다 보니 긴급 상황에서 소방차나 응급차가 길을 잘못 드는 위험한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고급스럽게 인식되는 주소를 어마어마한 비용으로 사들인다. 주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여주는 예다.      


책의 주제가 ‘주소’여서일까. 작가는 한 가지 주제에 직접 접근하지 않는다. 골목길을 돌아 돌아 길을 찾듯이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예를 들어 이란 ‘혁명 후에 거리 이름이 바뀌는 이유는?’ 장에서는 이란 소년 페드람의 어릴 적 이야기로 시작해서, 아일랜드의 보비 샌즈로 이어졌다가, 프랑스의 사제 그레구아르로 이어진다. 나아가 중국 공산당이 거리 이름을 어떻게 정치 선전의 수단으로 이용하는지, 미국의 독립혁명이 거리 이름과 이념을 어떻게 결합시키는지 말한다. 그렇게 전 세계를 돌아 다시 이란으로 돌아오는 식이다.

각 장의 구성이 이렇다 보니 주소를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알게 되는 즐거움이 크다. 목적지를 찾아가는 여정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교회나 성당의 이름이 들어간 거리에 사는 사람들이 종교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내가 사는 곳의 도로 이름을 떠올려본다. 이왕이면 ‘책읽는길’같은 이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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