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겨울방학, 나는 경기도에 사는 큰아버지 댁에 놀러 가게 되었다.
평소엔 “서울 큰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이번 방학을 통해 그곳이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라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아버지는 날 그곳에 데려다 주곤 2주 동안 오지 않으셨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평소에 자주 못 본 친척들과 좀 더 가까워지길 바라는 마음이었겠지.
서먹했던 건 잠시, 다행히도 사촌 형, 누나들이 나를 반갑게 챙겨줬다.
부산 사투리에만 익숙한 나에게,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형·누나들의 말투는 오글거리면서도 부드러웠다.
"니 밥 뭇나?" 대신
"밥 먹었어?"
이런 말이 그렇게 다정하게 들릴 줄이야.
말을 할수록 내 억양이 너무 촌스러워 보여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 형, 누나들은 이미 다 성인이었지만, 국민학교 6학년 꼬마였던 나를 위해 시간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하루는 동대문 시장, 또 하루는 놀이동산.
에너지 넘치는 나에게 지친 얼굴을 하면서도, 그들은 늘 웃어줬다.
어느 날 저녁.
다 함께 저녁을 먹고 식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집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부산 집에서는 밥 먹고 티브이 보거나 그냥 나가 노는 게 전부였는데,
이곳에선 식사 후 가족들이 식탁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그날, 내 인생에 처음 듣는 질문이 날아왔다.
“살면서 언제가 가장 행복했니?”
나는 당황했다.
“행복…?”
‘그게 뭐라고…’ 오글거리는 단어였다.
그런데 형, 누나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나씩 대답을 꺼냈다.
첫째 형은 글자도 마치 붓글씨처럼 잘 쓰고 말도 아주 근사하게 하는 형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등굣길에 있던 일이야.
여고 담벼락 옆에 작은 화단이 있었고, 가로수가 쭉 늘어서 있었거든.
그중 몇몇 나무에는 움푹 파인 홈이 있었어.
그 홈에, 어느 날 내가 직접 쓴 시를 쪽지로 넣어봤지. 그냥 누군가 봐줬으면 했거든.”
다음 날, 그 자리에 누군가가 답시를 넣어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를 주고받는 일이 몇 번 더 이어졌단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 같은 나무를 통해 시로 이야기했어.
그때가 가장 행복했지.”
‘형이 시를 썼다고?’
나는 조금 놀랐다. 부산 친구들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둘째 형은 긴 머리에 기타를 잘 치고, 손재주가 좋아서 나에게 직접 반지를 만들어주기도 했던 형이었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경주에 갔었거든.
자유시간 때 친구랑 뒷동산에 올라갔더니, 어마어마하게 굵은 나무가 있었어.
둘이서 팔을 벌려 안아봤는데도, 다 안을 수 없더라.
그 느낌이 너무 이상하게 좋았어. 양팔 가득 안기는 나무 느낌.
온몸으로 나무를 안았는데, 그 나무는 우리가 다 감싸기엔 너무 크더라고.”
‘나무를 안는 게 왜 행복하지?’
솔직히 이해는 잘 안 갔지만, 형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셋째 누나는 유독 나를 많이 챙겨주는 누나였다.
“난 엄마가 김장을 담그시는 날이 좋아.
엄마가 배추에 양념을 바를 때 그 옆에 앉아 구경하잖아?
그럼 배추 한 잎을 한 장을 떼서, 동그랗게 말아 입에 넣어주셔.
그걸 한입 가득 넣고 아삭 씹으면, 그 시원하고 감칠맛 나는 배추가…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도 매년 그런 김치를 얻어먹으면서도 그게 ‘행복’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형·누나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나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가슴에 품게 됐다.
그리고 2주가 꿈처럼 지나갔다.
부산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 감정을 그대로 들고 엄마에게 질문을 던졌다.
“엄마, 엄마는 언제가 가장 행복했노?”
밥을 먹다 말고 놀란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야가, 밥 먹다 말고 무슨 문 소리고?”
“엄마 우리도 대화 좀 해야 된다. 서울 가니까 이런 대화 윽쓰 하드라.”
난 아빠를 쳐다보며 말한다.
“아빠는 언제가 가장 행복했노?
“난… 화장실 갔을 때가 제일 행복하더라. 시원~하다 아이가.”
“하! 아빠. 그게 무슨 말이고.”
그 순간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땐, 대화를 포기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설펐던 질문과, 엉뚱한 대답으로 가득했던 그 저녁 식사가
어쩌면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