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과정 시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 11

박사는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by 브로콜리

어려운 수식이 가득한 과목을 듣던 시절이었다.

숙제가 얼마나 많던지, 죽을상을 하고 실험실에 앉아 이 책 저 책을 뒤져가며 숙제를 했다. 부족한 수학 실력에 눈물을 머금고 꾸역꾸역. 겨우겨우 제출했다. 졸업하신 박사님 한 분이 실험실에 들르셨다. 내 표정을 보시더니 뭐 하냐고 물으셨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너무 힘들다고 했다. 지도교수님 수업이니 박사님도 다 들었던 과목이었을 텐데,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래도 그건 답이 있는 거잖아요? 하면 되잖아. 안 그래?"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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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 잘하는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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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직장인 박사과정 학생이 졸업을 위해 상담을 요청해 왔다. 전공은 달랐지만 내 경험을 나눠줄 수 있을 것 같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다양한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느꼈다. 그 분야 과목들을 마스터했고 기초가 탄탄했다.

'이쯤이면 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한 파트를 맡겨도 되겠다.'

마침 나도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OO 씨, 이 분야 연구를 맡아주실 수 있을까요? 관련 연구비는 프로젝트비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OO 씨도 어차피 논문 써야 하고 예산 문제도 있으니, 이 분야를 연구해 보시면 어떨까요?"

같이 연구를 시작했다. 잔뜩 기대를 했다. 내가 모르는 분야를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다. 그런데 연구가 진행될수록 뭔가 이상했다. 생소한 분석 결과를 놓고 의견을 물으면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이건 이론적으론 이런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는 교수님께 여쭤봐야 할 것 같아요."

실험 진척이 없어 연락을 하자,

"기존엔 이런 방법을 썼는데, 이 경우엔 그렇게 하니까 안 되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교수님은 이렇게 하라고 하셔서 준비 중입니다."

논문을 잔뜩 읽었다. 수업도 열심히 들었다. 최신 기술도 공부했다. 그런데 정작 연구를 치고 나갈 수가 없었다. 정답지가 없으니 길을 잃고 헤맸다. 듣다가 나도 모르게 물었다.

"아니, 교수님 의견 말고... OO 씨 의견이 뭔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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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이 있는 문제 vs 답이 없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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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과정에 들어와서도 공부만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무언가 질문하면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청산유수로 답이 쏟아진다. 그 분야 개념을 꿰고 있고, 최신 논문도 줄줄 읊는다. 기초가 탄탄하다. 감탄이 나온다.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정답이 있다. 문제를 누군가 내주고, 답도 어딘가에 있다. 교수님이 알고 있고, 교과서에 나와 있고, 구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연구는 다르다. 문제를 내가 만들어야 한다. 답이 있는지도 모른 채 시작해야 한다. 풀이 방법도 없다. 맞는지 틀린 지 검증하는 것도 내 몫이다. 심지어 내가 풀고 있는 문제 자체가 맞는 문제인지도 내가 판단해야 한다.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정답지가 없는 순간 길을 잃는다. 공부는 박사과정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연구를 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지, 공부를 잘하기 위해 대학원에 온 게 아니다.

그 박사님의 한 마디를 이제야 제대로 이해한다.

"그래도 답이 있잖아요."

답이 있는 문제를 열심히 푸는 건 박사과정의 역할이 아니다. 아무도 풀지 않은 문제, 답이 있는지도 모르는 문제, 심지어 문제 자체가 맞는지도 모르는 것을 들고 씨름하는 것. 그게 박사과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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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도 못 푸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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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연구자들이 말한다.

"AI한테 내 연구 물어보면 엉터리 답이 나온다."

맞는 말이다. AI는 일상에서 획기적인 편리함을 준다. 글을 쓰고, 코드를 짜고, 정보를 정리하는 일은 놀랍도록 잘한다. 하지만 기존에 없는 문제, 정답이 없는 문제 앞에서는 AI도 길을 잃는다. 학습한 데이터 안에서 가장 그럴듯한 답을 꺼낼 뿐이다. 없는 문제에 대한 답은 만들어내지 못한다. 연구 자체를 AI에게 맡길 수는 없다. 연구는 답이 있는 문제를 푸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공부는 답을 찾는 과정이지만, 연구는 문제부터 만들어야 한다.

캡처.JPG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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