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순간은 없다, 다만 아직 연결되지 않았을 뿐

by 브로콜리

"이 수업, 나한테 왜 필요한 거지?"


박사과정 코스웍 중 통계 수업을 들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도교수님 수업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들었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내가 확률분포를 외우고, 회귀분석 숙제를 끌어안고 씨름하는 밤이 영 낯설었다. 분포는 뭔가 그리 종류가 많던지. 수식은 낯설었고 개념은 추상적이었다. 시험 때마다 '이게 내 연구에 언제 쓰이나' 싶었다.


그래도 최선은 다했다. 이왕 듣는 거, 제대로 이해하고 넘어가자는 생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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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다.


ML, AI가 연구 생태계를 완전히 바꿔놓기 시작했다. 논문마다 모델이 넘쳐났고, 학회 발표에는 딥러닝이 빠지지 않았다. 내 연구에도 그 흐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데이터를 해석하고 모델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낯설었던 통계 개념들이 하나씩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확률분포, 신뢰구간, 잔차 분석. 그때 씨름하며 익혀둔 개념들이 ML 모델의 결과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언어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모든 실험에 통계 개념을 꼭 활용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통계가 연구자에게 필수 과목이 아닐까 생각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P value 개념을 모르겠어요. 그냥 낮으면 좋은 거죠. 뭐" 같이 일하던 동료 박사 말에 난 한참을 설명해 줬다. 그래도 아리송 하단 표정이다.


'내가 이걸 알고 있네.'

그 순간의 느낌은 꽤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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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도 그랬다.


A 프로젝트는 힘들었다.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중간에는 방향을 잃기도 했다. 마무리를 지을 때쯤엔 솔직히 '남는 게 뭔가' 싶었다. 실패 기록처럼 느껴지는 연구가 있다. A가 그랬다.


그런데 B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


A 프로젝트에서 풀지 못한 숙제가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구축했던 실험 설계 방식, 실패 원인, 그리고 의외의 데이터 패턴. 그게 B 프로젝트 출발점이 되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았는데, 실은 전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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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졸업 축사에서 말했다.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앞을 보며 점들을 연결할 수는 없다. 뒤를 돌아봤을 때만 연결이 보인다.


박사과정 때 이 말이 그렇게 와닿았던 건, 아마 그 시절이 유독 '지금 이게 맞나' 싶은 순간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업도, 프로젝트도, 논문도. 당장의 의미가 보이지 않는 채로 버텨야 하는 날들이 많았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됐다. 이건 연구실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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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가 다 그렇다.


어색하게 쌓은 관계가 뜻밖의 자리에서 연결되고, 별생각 없이 읽은 책 한 권이 몇 년 뒤 결정적인 순간에 떠오른다. 힘겹게 버텼던 시간이, 나중에서야 그 시절이 있어서 지금 여기 있다는 말로 바뀐다.


지금 이 순간은, 미래의 내가 돌아볼 과거다.


당장은 의미가 보이지 않아도, 지금 내가 성실하게 찍고 있는 이 점이 언젠가 누군가의 점과, 혹은 내 다른 점과 연결될 것이다. 그 연결을 지금 알 수 없다는 게 답답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살 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미래의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지금 이 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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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은 그냥 지나가는 오늘이 아니다. 미래의 내가 반드시 돌아보게 될, 과거의 행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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