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할 수 있는 연구를
석사 과정 시절 직장생활과 병행한 대학원 과정은 살인적 스케줄이었다. 당시 S사에 다니며 나와 같이 강행군을 하던 박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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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철 멘탈 박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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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의 상황은 나보다 훨씬 열악했다.
나는 당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녀가 없었다. 하지만 박형은 어린 아들이 둘이고 형수는 지병으로 병원을 다녔다. 매주 창원, 부산, 대전까지 KTX를 타고 올라가는 게 나도 힘들었는데 박형은 어떻게 버텼을까.
당시에도 막연히 대단하다 생각했었는데 지금 내가 자녀를 키우는 시점에서 그때 생각을 하면 박형은 정말 강철 멘탈을 보유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박형은 항상 웃었다. "괜찮아, 할 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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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박 속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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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박형과 나는 매주 랩실 박사과정 선배와 미팅을 하며 연구 내용을 토론하고 계획을 수립했다.
선배는 나에게는 그럭저럭 괜찮다고 했지만, 박형에게는 날카로웠다. "이 정도 진도로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아?" 박형은 그럴 때마다 "죄송합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하고 웃었다.
미팅에서 박형은 선배께 알게 모르게 구박을 받았던 기억이다. 하지만 그런 은근한 압박도 아랑곳하지 않고 박형은 결국 논문을 잘 쓰고 졸업을 무사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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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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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미팅 후 점심을 먹었다. 유난히 힘든 시기였는데 난 박형에게 물었다. "형, 선배가 저렇게 구박해도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어요?"
박형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난 하고 싶지만 못하는 건 빨리 포기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연구를 하려고 해. 나도 멋지고 어려운 연구하고 싶지만 어차피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내 상황도 여의치 않으니 욕심부리는 것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연구로 졸업하고. 나중에 정말 하고 싶은 걸 하려고."
지금 할 수 있는 연구!
누구나 머릿속으론 세상을 뒤집어 놓을 연구를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자괴감을 느끼는 친구들을 종종 본다.
대학원에 들어오면 학부 때 배웠던 어려운 수식들과 시험기기, 소프트웨어들로 멋들어진 연구를 할 줄만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매일 같은 실험에 '이렇게 수준 낮은 실험은 학부생도 하겠다' 할 만한 일들을 계속하다 자괴감이 든다.
실제 내가 아는 선배는 학부생 시절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1년도 안 되어서 잠적해 버렸다. 그리고 그 형이 한 이야기는 "중학생이 해도 될 일을 시키고 있어!"였다. 아마 대학원 초반에 단순 실험을 계속 시켰을 거라 추측된다.
나도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자괴감이 들 때가 있다. 특히 다른 연구자들의 멋지고 있어 보이는 논문들을 볼 때면 '난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는 박형을 떠올린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고 차근차근하자고. 첫 술에 배부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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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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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차근 밟아 나간다는 말이 더 맞기도 한 것 같다. 무작정 하고 싶지만 어려워서 포기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고 다음에 또 다른 부분을 조금 더 하고 이렇게 최종적으로 내가 원하는 걸 완성해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은 비록 미약하고 좁은 연구 범위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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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은 무사히 졸업했다. 하고 싶었던 연구가 아니라 할 수 있었던 연구로 졸업했다.
나는 지금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자괴감을 느낄 때 박형을 떠올린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자."
조금씩 조금씩 쌓아가자. 박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