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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바라중독자 May 29. 2023

11 명주

        

 명주는 집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어제 밤 늦게까지 뭔가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엄마는 오늘 늦잠을 잤다. 그래도 명주에게 아침 두유는 최악이다. 엄마와 두유를 피해 집을 먼저 뛰어나온 명주였다. 학교 갈 시간이 훨씬 지난 것 같은데 저 애는 교복을 입고 어딜 가는지, 이 추운 날 얇은 후드티 차림이다. 쿨냄새를 풍기며 느릿느릿 걷는 선재를 쓰윽 지나 뛰어가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보는 명주다. 새 친구 사귀는 것, 학년이 바뀌는 것과 비슷하겠지.     


 현정은 먼저 나가버린 명주를 부른다. 아침도 못 챙겨줬네, 한끼라도 굶기면 안된다는 신념에 바나나와 두유를 손에 들고 현정은 명주를 뒤따라 나선다. 평소 운동부족인지 나이 때문인지 계단을 빠르게 지나 골목을 달리고 있는 지금, 현정의 숨은 이미 턱 밑까지 차올랐다.     


 “명주야~! 아휴. 걸음이 왜이리 빨라. 엄마 힘들다, 늙었나봐. 하이고, 헉헉......”

 “엄마는 운동을 좀 해야 돼. 엄마 지금 갱년기잖아. 늙은 거 맞네. 눈에 주름 봐~ 할머니네, 할머니~”

 “그래도 몸매는 이 할미가 더 낫네요오~ 너는 아가씨가 이렇게 다리가 두꺼워서 어떡할래?”

 “난 매일 앉아서 공부하니까 그렇지~ 대학가면 날씬해질 예정이거든여! 그 땐 찐할미라고 불러드릴께여!”

 “제에발 그래라~ 엄마는 할머니여도 상관없거든! 그건 그렇고, 아침은 먹고 가야지. 이거나 드셔~ 아, 안되겠다. 너 이거 먹으면 또 다리에 저장할 거잖아. ㅋㅋㅋㅋ”

 “아~ 엄마아~!”     


 명주는 바나나만 받아들고 엄마와 살가운 인사를 마친 후 학교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선재의 눈빛을 등으로 느끼며, 명주는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 지각한 것 같은데 느긋한 저 자세는 뭐지? 특이한 애네.      


 교무실을 들러 2학년 4반에서 인사를 마친 명주는 빈 자리 옆에 앉아 책들을 꺼내었다. 수업 을 마치고 쉬는 시간이 되자 뒷문에서 아까 봤던 얇은 후드티 소녀가 무심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명주 옆 빈자리에 낡은 가방

을 툭, 놓더니 슬쩍 명주의 목도리에 눈길을 줄 뿐 아무런 말이 없다.      


 예의없고 개념없는 사람들을 가장 경멸하는 명주였으나, 명주는 이상하게도 선재의 그런 모습이 예의없어 보인다거나 거부감이 느껴지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단순하고 무감하게만 느껴졌다. 명주가 느낀 선재의 눈빛에는 반항심이나 배려없음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멋져보이고 싶다거나 세보이고 싶은 그런 종류의 침묵이 아니었다. 단지 텅 비고 부족하여, 또는 버거움 등으로 상대에 대한 관심까지는 미처 담지 못한 그런 눈이랄까. 명주는 그저, 춥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명주는 먼저 인사를 건넨다. 

 “안녕, 반가워, 난 서명주야.”

 “......”

 “춥겠다.”

 “어......”     


 부끄러움이 많은건가. 명주는 대충 대답하는 선재가 밉지 않았다. 전에 엄마가 그랬다. 열명의 사람이 있다면 내게 무관심한 사람이 반절, 나머지 셋은 무난한 사이, 그리고 한 명은 나를 이유없이 싫어하는 사람, 마지막 한 명은 나를 이유없이 좋아해주는 사람이라고. 명주는 선재가 아무 이유도 없이 마음에 들었다. 아까 처음 옆을 스쳐갔을 때 느릿한 걸음부터 쓸데없는 말을 섞지 않겠다는 듯 대답을 아끼는 모습까지.      

 



 선재는 친구가 없었다. 혼자 밥을 먹는 선재의 모습에 명주는 선재 옆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말없는 선재 대신에 명주는 시덥지 않은 이야기까지 떠들어댔다. 선재는 산처럼 쌓인 밥을 뜨고 반찬을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고개만 가끔 끄덕끄덕, 명주의 말들을 들어주었다. 명주는 어떻게 저렇게 마른 몸에 저 밥이 다 들어가지 하며 신기해했다.      


 평소같던 점심시간, 급식에 두유가 나왔다. 선재는 이미 두유를 집어 자리를 찾아 가고 있었고 명주가 두유를 집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명주 귀에 대고 소근대는 소리가 들렸다.     


 “야, 전학생, 너 저 도둑아줌마 딸이랑 친하게 지내지마. 쟤네 엄마가 우리 교회 사람들 돈 훔쳤어. 쟤 이상한 냄새도 나지 않아? 암튼 그렇다고. 걱정돼서 해주는 말이야. 아는 사람들 다 알아.”     


 명주는 알 수 없는 말을 무시한 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선재와 함께 밥을 먹었다.    

  

 “선재야, 이따가 김뽁 먹으러 올거지?”

 “어.”     


 명주는 오늘 아침 대화 중에 선재를 집에 초대했다. 저녁에 김치볶음밥을 먹으며 선재랑 더 친해지고 싶었다. 명주는 선재와 더욱 친해질 기회가 생긴 것 같아 기대에 차서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저런 말을 듣다니. 명주는 남의 말만 듣고 사람을 평가하고 싶지 않았다. 오면, 좋아하는 것부터 이것저것 물어봐야지. 뭔가 오해가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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