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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바라중독자 Jun 12. 2023

12 명주 2 - 상식적인 행동

      


 “하지마! 너 뭐하는 거야!”

 “뭐래. 맨날 너는 뭔 상관이야. 신경 꺼라. 너네 뭐 사귀어? 죽고 못 살아? 대~박. 레즈커플 그런거야? 우웩. 토 쏠려.”


 아이는 들고 있던 텀블러 속의 미숫가루를 명주의 얼굴에 뿌렸다. 명주의 얼굴에는 온통 진흙같은 갈색의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희야~ 내가 명주 진흙팩 시켜줬는데 어때? 맘에 들어? 하하하하하...... 아빠한테 가서 친구랑 재미있게 귤 먹었다고 확인시켜드리라고 그러는 거야. 집까지 잘 가지고 가라~”     


 세희는 즙이 흐르는, 씹어 뭉개진 귤을 머리에 올린 채 당황한 얼굴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고, 명주는 미숫가루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쓰윽 닦아내며 말했다.      


 “니가 레즈라서 레즈커플만 보이는거지? 난 오픈 마인드니까 이해해줄게.”

 “뭐어? 이 미친년이 뭐라고 지껄이고 지랄이야!! 누가 레즈야, 이 미친년아!!!”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 아이를 뒤로 하고 명주는 화장실로 향했다. 세희는 그런 명주 뒤를 쫓아왔다.      

 “미... 미안해.”

 “괜찮아. 근데 세희야, 너도 계속 당하지만 말고 대꾸해버려. 저런 쓰레기한테는 똑같이 해줘야돼.”

 “나...는 너무 무서워서...... 정말 미안. 흐흐흑......”     


 명주는 울며 뒤돌아 뛰어가는 세희의 뒷모습을 보았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미숫가루가 명주의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맛있네. 쟤네 엄마도 저런게 예쁘다고 바쁜 아침에 미숫가루 맛있게 타서 챙겨줬을텐데 학교와서 이런 짓이나 하고 있는 걸 아실까, 하고 명주는 생각한다. 딩동, 수업 시작종이 울리자 명주는 생각을 멈추고 세수를 하기 위해 얼른 화장실로 뛰어들어간다.     






 내일이면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갈 명주는 가만히 하늘색 방에 누워 발가락을 까딱이며 옛일을 생각하고 있다. 세희는 코 끝 까지 내려간 안경을 쓰고 여드름이 난 통통한 볼을 가진 소심한 아이였다. 아빠와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명주는 때때로 딸이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데 왜 세희아빠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걸까, 하고 생각했었다.      


 어느 겨울, 세희는 귤이 먹고 싶은데 아빠가 안 사줘, 라고 했다. 명주는 집에 있던 귤을 몇 개 가지고 와서 세희에게 건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평소에도 세희를 무시하고 괴롭히던 아이는 그날도 좋은 먹잇감을 찾았던 것이다. 아이는 눈빛을 세희에게 고정한 채 허락도 없이 귤을 하나 집어 대강대강 껍질을 벗기고선 주황의 즙이 줄줄 흐르는 귤을 와구와구 씹었다. 그리고는 씹던 귤을 꺼내어 세희의 머리 위에 놓았다. 옆에 있던 명주는 화가 나서 한마디 던졌고 그대로 미숫가루를 얼굴에 맞았던 것이다.     


 현정은 ‘그러다가 걔가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도 잘했어. 너는 상식적인 행동을 했을 뿐이야. 명주가 세희 근처에서 잘 관찰해. 지지마, 우리딸.’이라고 했다. 명주는 엄마의 지지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학교에서 되도록이면 세희 근처에 있었다. 그 날 귤사건 이후로 아이가 세희를 괴롭히는 일이 잠잠해지는 듯 했다.      


 겨울이 지나고 학년이 바뀌면서 세희와 명주는 다른반이 되었다. 새학기가 시작되던 날, 학교에서는 비명소리가 났다. 수업 중이던 선생님들 몇몇은 교무실에 호출되었고, 뒤이어 구급차와 경찰차 소리가 났다. 아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울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명주 역시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학교 뒤편 창문으로 내다보았다. 쓰레기장 앞에 세희가 피를 흘리며 누워있었다. 세희의 아버지가 학교에 오고 애끊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세희는 먼저 갔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세희는 귤사건 이후로 더욱 심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학교 수업 중에는 옆에서 지켜볼 수 있어서 잠잠해진 줄 알았는데 집의 방향이 명주와 달라서 방과후의 모습은 알 수가 없었다. 방학 중에도 불러내어 이유없이 때리거나 셔츠 단추를 풀어 속옷이 다 보일 정도로 옷을 반쯤 벗겨놓고 밤새 아무도 없는 골목 전봇대에 케이블타이로 손과 발을 묶어둔 적도 있었다고 한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런데 세희는 항상 괜찮다고만 했다. 괜찮다고만......      


 명주는 세희가 그렇게 가고 나서 일상생활을 못할 정도로 힘들어했다. 명주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만 같았다. 다 나 때문이야. 내가 가만히 있었더라면 괜찮았을지도 몰라. 내가 더 잘 관찰했다면...... 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된거야, 하며 학교도 가지 못한 채 울기만 했다. 현정은 옆에서 말없이 명주를 달래주었다. 병원치료와 상담을 했다. 결국 명주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고 상태가 약간 호전되었을 때에는 집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현정은 명주가 나아지면, 이참에 전부터 생각했던 이사를 꼭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겨울 아침의 차갑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명주는 혼자서 학교로 향했다. 엄마는 학교에 같이 가자고 했지만 밤새 뭘했는지 늦잠을 잤다. 혼자서 다시 학교로 돌아갈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이미 마친 명주는 개의치 않았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안타까운 사고였다고 이제는 마음을 굳게 다잡을 수 있다. 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다시 사람들 사이로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고.      


 명주는 얇은 후드를 입고 천천히 걷고 있는 또래의 여자아이 곁을 스쳐 골목을 뛰어간다. 좋은 예감이 명주를 들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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