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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바라중독자 Jul 03. 2023

15 인생은 스스로



 “네, 안녕히...... 가세요. 김치볶음밥 하나, 김밥과 라면세트 하나, 돈가스 하나 맞으세요? 이만...... 팔천원입니다.”

 “어이, 정신 차려.”

 “네, 죄송합니다.”     


 며칠 째 잠을 못 잔 선재는 눈이 저절로 감겼다. 요즘따라 자꾸 꿈을 꾼다. 몇 년 전 선재를 버리고 간 깡마르고 시커먼 안색의 엄마와 얼굴이 뭉개져 사람의 형체만 있는 아빠가 나온다. 엄마는 생전 처음보는 온화한 표정으로 선재에게 무언가 말하지만 당췌 알아들을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명주가 분명 선재를 향해 뛰어오고 있지만 점점 멀어진다.     


 “어차피 교대시간 되었으니까 그만 들어가. 어디 아파?”

 “아뇨. 잠을 못 자서 그런 것 같아요.”

  "뭣헌다고 잠을 못 자.”     


 선재는 주연이 이모와 근무교대를 한 후 숙소로 곧장 갔다. 삐걱거리는 작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 눈을 감은 선재의 머릿속에서는 옛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처음으로 명주와 함께 동네나들이를 갔던 일, 널뛰기한답시고 비틀거리며 웃었던 일, 명주네 집에서 먹었던 따끈따끈한 김치볶음밥, 명주어머니와 셋이 음료를 부딪치며 치킨먹던 일, 그리고 자식을 버리고 밤사이에 도망가버린 부모.     


 하루가 멀다 하고 선재아빠를 찾는 아저씨들이 집에 들락거렸다. 어느 날에는 법원에서 편지가 오고, 어느 날에는 어른들이 와서 선재에게 더 이상 이 집에서 살 수 없으니 나가라고 했다. 길바닥에 내몰린 상황에 학교에 다니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판단에 선재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명주네에서 신세를 지다가, 숙식이 제공되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일하게 된 것이었다.      




 선재는 그날, 아침부터 빈 집 현관앞에 앉아 어린 아이처럼 울었다.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그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울다 지치면 멍해졌다. 그러다가 다시 눈물이 났다. 명주에게서 계속 연락이 왔지만 손이 떨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렇게 선재의 하루는 배신감과 눈물에 젖은 채 흘러 지나가고 있었다. 늦은 오후 즈음, 현관앞에 쭈그리고 앉은 선재의 뒤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선재니?...... 선재야.”

 “......”

 “아줌마야. 명주엄마.”

 “아... 안녕하세요.”

 “아줌마가 너희 집에 들어가봐도 돼?”

 “......네.”

 “계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선재친구 명주 엄......마......”     


 현정은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같은 선재의 집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당황의 시간 몇 초가 지나고 현정은 선재에게 물었다.     


 “선재야. 넌 괜찮아? 혹시 다친데는 없어?”

 “네......흐흑......흐흐흑......”

 “괜찮아...... 아줌마가 집 확인해볼게. 혹시 어머니는......?”

 “으허허헝......”

 “그래. 괜찮아. 아줌마가 여기 같이 있을께.”     


 현정은 울고 있는 선재를 안아주었다. 들썩이는 마른 어깨를 보자 현정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선재가 말하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전에 자신의 바지에 가래침을 날리던 깡마른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현정은 한참동안 선재를 안아주고 나서 선재가 진정되자 난장판이 된 선재의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유리조각이나 쓰레기를 치우고 나서 모든 전기제품도 다 뽑아 놓았다. 그리고는 선재에게 필요한 물건과 옷가지를 챙기라고 시켰다. 잠금장치조차 모두 망가진 이 집에 아이 혼자 둘 수 없어, 현정은 선재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였다.     


 “아줌마가 어떤 상황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선재 혼자 이 집에 있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은 분명해. 위험하니까 우리집에서 당분간 지내. 우편물이나 너희 집에 관련된 사람들은 아줌마가 만나볼게.”     


 여러 사람들이 선재의 집에 왔다 갔다. 사람들은 올 때마다 선재의 집을 어질러 놓았으며 선재아빠를 찾았다. 현정은 적절한 타이밍에만 나서서 최소한의 설명과 약간의 거짓으로 선재의 신변을 보호했다. 그러는 한두달 동안 선재의 집은 폐가처럼 변했고 선재는 어차피 들어갈 수도 없었다. 법이 그렇다고 했다. 선재는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그나마 있던 부모도, 어쨌든 있던 집도 모두 잃게 되었다.     


 언제까지고 명주네 집에 있을수는 없었다. 명주와 현정에게 너무 미안했던 선재는, 이 고마움을 나중에 꼭 갚으리라는 마음을 간직한 채 어느 새벽 슬그머니 일어나 알아봐두었던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세상은 신기했다. 명주와 도서관행사에 놀러갔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공짜밥을 먹고 선물도 받았었다. 찾아보니 돈도 주고, 밥도 주고, 누울 자리까지 제공하는 일자리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지멀쩡했던 엄마는 왜 맨날 집에서 놀기만 했을까.      


 선재는 순간 배신감이 밀려왔지만 멈춘 버스의 마찰을 느끼며 숨을 크게 한 번 쉬었다. 버스를 다시 갈아타고 앞으로 일하게 될 휴게소에 도착했다. 이제는 정말 나혼자 살아야 한다. 이제는 진짜야. 나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어. 갑자기 시작된 홀로서기이지만 선재는 스스로가 꽤나 강한 사람임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방을 안내받은 후 짐을 풀었다. 가방에는 작고 하얀 토끼얼굴의 키링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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