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섯]은 소설입니다. 글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 장소, 지명, 배경 등은 허구이므로 실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주 1회 업데이트됩니다.
선재는 저녁밥만 먹고 학교를 나선다. 그나마 학교에서 밥을 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다른 애들처럼 떡볶이나 닭강정같은 간식을 사먹을 수는 없지만 어차피 몸매관리하느라 사람들 먹지도 않는데 뭘, 하며 위안을 삼는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선재는 안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불가능해서 못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한참 먹을 나이의 선재는 사실 떡볶이도 먹고 싶고 닭강정도 먹고 싶다.
다른 애들 저녁밥 먹고도 학교에서 공부하던데 나도 해볼까. 나는 교과서밖에는 없는데. 교과서만 읽어도 시험을 잘 볼 수는 있는건가? 시험을 잘 보면 뭐가 좋은 거지? 대학에 가면 돈 많이 든다는데 그럼 나같은 사람은 어차피 못 가는거 아닌가? 그런거면 시험을 잘 볼 필요도 없겠지. 그렇다고 이렇게 하루하루 끼니만 때우고 살다가 엄마처럼 되는거 아닌가 몰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물어볼 사람도 없고...... 선재는 오늘도 답을 찾지 못한 채 어느새 답답한 집 앞에 도착한다.
철컥, 삐리릿. 최근 선재네 옆에 오래된 빌라를 부수고 꽤나 근사한 빌라가 새로 지어졌는데, 명주는 그곳에 이사온 것 같았다. 명주와 명주엄마는 그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동선을 따라 켜지는 계단의 불빛, 또 무슨 할 얘기가 많은지 깔깔거리는 모녀의 수다. 명주의 집은 2층이었다. 2층 창문 너머 굳게 닫힌 최신 디자인의 견고한 문이 살짝 보인다. 문이 열리고 저 시끄러운 모녀가 건물외관처럼 새 것들로 치장했을 집에 들어간다. 슬쩍 보이는 현관의 각진 조명에서조차 온기가 느껴진다.
문이 닫히자, 새 빌딩 안에 다시 어둠이 들어찬다. 그 어둠은 설렘과 기대의 어둠이었다. 누군가의 기척이 있으면 지체없이 켜지는 밝음을 위해 잠시만 빌린 어둠, 그런 것이었다.
선재는 눈앞에 있는 자신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기대나 설렘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집으로 내려가는 그저 컴컴한 계단이다. 한숨을 내쉬며 제대로 된 잠금장치 하나 없는 비틀린 문을 힘주어 연다. 침침한 집. 스위치를 누르자 형광등은 꺽꺽 여러번 숨을 헐떡이다 울컥 누런 빛을 뱉는다. 엄마는 자고 있고 아빠는 집에 없다. 선재는 바닥에 널부러진 전단지쪼가리와 깨진 플라스틱 그릇을 발로 대충 밀며 집에 들어선다. 음식이 담겨야 할 그릇인데 발 밑에 있다. 자기 자리가 아닌, 바닥에 굴러다니는 낡아빠진 플라스틱 그릇은 깨지고 닳고 기스도 있다.
문득 선재의 눈 앞에,깨끗한 식탁에 앉아 날리는 벚꽃이 그려진 하얀 접시에 담긴 김치볶음밥을 먹고 있는, 곰돌이 잠옷을 입은 서명주의 모습이 그려진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치볶음밥, 그 위에 앙증맞게 자리한 노란 계란후라이. 옆에는 엄마가 웃으며 서명주의 이야기에 대꾸하며 사과를 깎는다. 투명한 과일접시에 소담하게 놓여진 뽀얀 사과들. 서명주와 서명주엄마는 동시에 선재를 바라보며 묻는다.
‘같이 먹을래?’
뭐. 뭐 어쩌라고. 난 쟤가 싫어. 이게 우리집이야. 근데 뭐 어쩌라고.
선재는 깨진 플라스틱 그릇을 발로 툭 차버린다.
선재는 눈을 번쩍 떴다. 아직 학교에 가려면 30분이나 남았다. 일어난 김에 학교에 일찍 가기로 했다. 담배냄새와 지하집 특유의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섞여 썩은 향수냄새처럼 배어버린 교복을 입은 선재는 침침한 현관문 앞에 서서 한참이고 2층 서명주네 집을 바라보았다.
철컥, 명주의 집 문이 열린다. 명주는 웃으며 엄마에게 손을 흔든다. 명주가 발을 딛는 곳마다 계단 조명이 봄날의 벚꽃처럼 뿌려진다. 곧 명주가 나올거라는 생각이 번쩍 들어, 선재는 황급히 눈을 돌려 뛰어 나간다.
“야~! 너 내 짝꿍이지? 같이 가자! 야~! 너 왜 모른척 해! 너가 안 알려줬어도 나 니 이름 알아. 명찰 봤어! 선재야!”
선재의 뒤통수에서 외치는 명주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온 동네에 울린다. 명주의 호들갑에 선재는 가던 길을 멈춘다. 좀 조용히 해. 내 이름 광고하니?
“선재야! 선재야!! 같이 가자니까~!! 야~!!!”
“조용히 해.”
“선재야!”
“조용히 좀 하라고. 하......”
“히힛. 선재야. 같이 가자. 너 우리 옆집 살아? 오~ 좋다~ 우리 매일 같이 학교 가면 되겠다!”
“......”
“선재야, 아침밥 먹었어?”
“......아니.”
“안 먹었어? 이거 먹을래? 난 두유 안 좋아하는데 엄마가 줬어.”
두유다. 5년 전에 교회에서 처음 먹어봤던 고소한 두유. 엄마가 교회의 돈을 훔친다는 것을 알게된 뒤로는 교회에 갈 수가 없어 먹지 못했던 달콤한 두유. 학교에서는 두달에 한번 나올까말까하는 맛있는 두유.
“안 먹어.”
“아 그래? 그럼 엄마 모르게 저쪽에 버려야겠다.”
“그, 그냥 주든지. 나도 딱히 좋아하진 않아. 니가 버린다고 하니까 그런거지.”
“그래? 자. 근데 너 좋은 애 같아. 어제 하루 교실 애들 둘러봤는데 다들 조금 뭐랄까, 냉정해서 무서워. 너는 안 무서워.”
“이 동네 원래 그래.”
“이 동네 오래 살았어?”
“어.”
“그렇구나. 이 동네 어떤데?”
“그냥, 다 자기 살기 바빠. 넉넉하지도 못하고.”
“그렇구나. 너는 안 그래 보이는데? 사실은 어제 아침에 골목에서 너 봤거든.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 천천히 걸어갔잖아. 그 모습이 뭔가 여유있었달까? 하하하~”
“나 땡땡이 친거야.”
“알아~ 그래도 학교 왔잖아. 땡땡이 아니고 지각!”
얜 날 언제봤다고 오래전부터 나를 알았던 사람처럼 얘기하네. 선재는 처음 받아보는 오로지 자신을 향한 적극적인 관심이 어색하여 명주가 건넨 두유에 빨대를 팍팍 소리나게 꽂고선 있는 힘껏 쭉 빤다. 달근하고 고소한 맛이 선재의 입안에 돌기 시작한다. 단순한 행복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굳이 상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