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놀이터 사건 이후 어쩐지 명주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는 일이 꺼려졌다. 지난번 그 여자를 또 만나면 어색할 것 같았다. 그래서 주로 다른 쪽 놀이터로 명주를 데리고 갔는데, 그 날은 명주가 짚라인을 타고 싶다고 하여 다시 그 놀이터에 가게 되었다.
- 알립니다. 미래아파트 301동에서 410동에 거주하시는 분들(임대동)은 본 놀이터의 사용을 엄격히 금지합니다. 본 놀이터는 에코트리 세대만 이용이 가능하니 각 세대의 키를 지참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키 미지참 시 본 놀이터의 이용이 불가능합니다.) -
못 보던 안내장이 놀이터 입구에 붙어있었다. 놀이터를 빙 둘러 펜스가 쳐져 있었고, 한쪽 옆에는 카드키를 인식할 수 있는 기계가 부착되어 있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현정은 곧장 관리사무소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말씀 좀 물을께요. 기린놀이터 안내문이 왜 붙어있게 된건가요?”
“미래아파트 임대동 사시면 못 들어가세요.”
“아뇨, 저는 에코트리 505동 203호에요. 언제부터 왜 저런 안내문이 있게 된거에요?”
“아~ 에코트리세요? 지난주에 운영자치위원회에서 결정된 일이에요. 찬성이 많아서 바로 시행했어요.”
“찬성이 많았다구요?”
“네. 사실 그 전부터 민원이 많았거든요. 임대동 애들이 와서 놀이터를 더럽히고, 오히려 주민들이 놀이터를 이용할 수 없게 한다는.”
“기린놀이터가 유명하긴 해도 주민들이 이용못할 정도로 밀리지는 않았어요. 줄을 서도 짚라인 정도였어요.”
“아시잖아요. 주민분들 그런 문제 예민하신거. 임대동 지저분한 애들 왔다갔다 하면 집값 떨어진다고도 하고.”
“임대동 아이라고 지저분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집 열쇠까지 확인해가며 놀고 싶은 애들을 못 놀게 한다는게...... 아이들 상처받겠어요. 좀 너무 한 것 같아요.”
“이미 결정된 일이라서 저희도 어쩔 수 없어요. 다음번 회의 때 다시 건의해보세요.”
현정은 기가 찼다. 어떻게 어른들 욕심으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매정할 수가 있는지.
- 어릴 때부터 다 자기 수준에 맞게 사는거에요! -
현정은 억세게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지르던 여자의 말이 생각났다. 자기 수준이라...... 돈? 집값? 좋은 옷?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게 그런건데. 자신의 위치가 바뀌게 되었을 때에도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까? 더 잘 사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해도 과연 자신은 그래도 된다고, 당연하다고 생각할까? 다음 회의 때 건의해보라고 했지, 현정은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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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그건 안됩니다.”
“임대동 산다고 해서 노는 일로 차별해도 된다는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와서 논다고 그걸 못 놀게 하십니까.”
“임대동 애들이 오는거 자체가 싫다구요. 걔네한테는 무슨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맞아요. 임대동은 분위기가 우울하고 삭막하고 그래요. 그런 곳에서 크는 애들이 어떻겠어요. 그런 애들이 우리 애들하고 같이 노는 걸 생각만 해도 찜찜하다구요.”
“임대동 애들 근처에 돌아다니면 집값도 떨어질거에요.”
“자, 자, 그만들 싸우시고, ‘기린 놀이터 안내문을 게시 중시하고 카드키 인식기를 제거한다’는 의견에 찬성하시는 분은 나누어 드린 종이에 표시해 주시고 두 번 접어서 여기 넣어주시길 바랍니다.”
찬성 2, 반대 18. 현정은 패했다. 평화롭기만 한 줄 알았던 사람들의 면면에는 욕심으로 가득한 추악함이 보였다. 사람들은 애초에 안될 일을 문제삼는다는 듯한 표정을 현정에게 보냈다. 현정의 눈에는 반대표를 던진 사람들의 입이 눈 밑까지 한껏 찢어져 올라가고, 그 속엔 뾰족한 이빨이 가득했으며, 일그러진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충혈된 눈들은 혼탁해져 추함이 극대화되는 듯 보였다. 현정은 무서웠다. 저 사람들도 자식이 있을텐데.
현정은 굳은 얼굴로 세미나실을 먼저 나왔다. 곧이어 승리한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수군대며 나왔다. 앞에 있던 현정을 발견하고는 음성으로만 친절한, 무표정의 인사를 건네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현정 역시 등 뒤의 냉기를 느끼며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 누군가 현정을 작게 불렀다.
“저기요.”
“네.”
“안녕하세요, 전 505동 2404호에요. 같은 동이시죠? 오며가며 한번씩 뵌 것 같은데.”
“아, 네. 그러고 보니 스치며 뵌 것 같아요.”
“저도 찬성했어요.”
“아, 그러셨어요?”
“네. 사람들 참 너무하죠? 다들 욕심쟁이 같아요. 각자 사정이야 있겠지만. 실망하셨겠어요.”
“네. 좀...... 마음이 그렇네요. 저까짓게 뭐라고 저렇게들 매정한지.”
“상심마세요. 우리같은 의견도 있다는 걸 알렸으니 그 정도도 괜찮다고 봐요. 저 사람들 지나다 만나면 우릴 째려보긴 하겠지만요. 하하핫~”
“하하~ 네, 맞아요. 감사해요.”
“사실 저희는 다음주에 이사가요. 이 동네 살기 좋긴 한데 사람들 보시다시피 너무 이기적이에요. 조금 작은 단지로 가려구요. 사람사는 기분 좀 느끼고 싶어요. 그럼, 들어가세요~”
그래. 맞아. 이사. 나도 이사를 해야겠어.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명주를 키울 수는 없어. 난 명주에게 이런 이기심을 가르치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