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날, 혼자서라도 동네 행사에 가본다거나 도서관이든 어디든 놀러갈 수 있다는 것을 선재는 새삼 깨닫고는 그 당연한 것을 여태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에 스스로 한심함을 느꼈다. 지난주까지도, 쉬는 날이면 뭘 해야할지 몰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누워 뒹굴거리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다. 부모의 작은 관심조차 받지 못하던 선재에게,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서명주와 나란히 걷는 이 동네가 마치 다른 동네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끝없이 조잘거리는 친구와 함께 걷는 일, 매일 똑같다고만 생각했던 우리 동네를 새롭게 보는 평범한 일도 선재에게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단지 골목을 걷고 있을 뿐인데 몸 속까지 때를 밀어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심장이 빨리 뛰기도 하고 상기된 얼굴과 기분에 몸이 붕 떠있는 것 같기도 했다. 행복하다는 것, 그것은 특별한게 아닌 듯 했다.
골목을 벗어나 왼쪽으로 돌면 반석교회가 있다. 맛있는 두유를 먹을 수 있었지만 사람들의 돈을 훔치는 엄마 때문에 더 이상 가지 못하게 된 교회. 선재는 혹시나 교회사람들을 만날까봐 눈길을 다른쪽으로 돌린다. 선재는 이 새로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열심히 주변을 살폈다. 눈길이 닿는 곳에는 편의점, 철물점, 옷집과 그 밖에 못보던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길 한 구석에 핀 민들레까지도 눈에 꾹꾹 담는다. 노란게, 예쁘네.
“야, 우리 저기 가보자.”
“구경하고 가세요~ 수제 가방입니다!”
“키링이에요. 예쁘죠?”
화장한 날씨에 도서관 마당의 행사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자들이 각자 작은 천막 아래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뜨개질로 만든 바나나며, 모자, 식빵부터 아기옷, 작은 화분들, 책, 쿠키, 장난감들. 이곳이 바로 명주가 말한 플리마켓인 것 같았다. 어떤 곳은 새 물건들인데 어떤 곳은 중고물품처럼 보였다.
“이거 얼마에요?”
“그건 2개 천원이에요.”
“우와~ 천원이요? 이거 주세요.”
명주는 하얗고 작은 토끼 얼굴이 달려있는 키링 2개를 샀다. 명주의 반응으로 봐서는 저 키링들을 매우 싼 가격에 구매한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물건들이 두서없이 놓여져 있었고 그 곳은 중고물품을 파는 곳이었다.
“우리 이거 하나씩 하자. 너무 귀엽지 않아?”
“......”
“아이 참, 뭐든 줘봐. 핸드폰이든 지갑이든. 음....... 뒤 돌아봐.”
명주는 선재가 메고 있던 가방에 토끼키링을 달기 시작했다.
“너랑 잘 어울린다. 선재야. 떼면 안돼. 알았지?”
“고마워. 안 뗄게.”
선물...... 매섭게 춥던 어느 크리스마스 날, 교회에서 누구에게나 주던 차가운 과자 꾸러미. 선재가 받았던 첫 번째 선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는 다른 기분이 드는 선재였다. 아무런 목적없이, 친구가 마음을 담은 것이라는 생각에 약간의 감동이 일었기 때문이다. 생일에도, 어린이날에도 껌하나 조건없이 받아보지 못했던 선재는 이런게 진짜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선재야 예쁜 거 많지? 우리 천천히 다 구경하고 조금 이따가 저쪽 유아동열람실 앞에 비빔밥 먹으러 가자. 아직 한시간이나 남았어. 오, 선재야, 저것 좀 봐. 널뛰기 있다!”
선재는 서명주의 손에 이끌려 난생처음 책에서나 보던 널뛰기판에 올라섰다. 선재와 명주는 몸치가 춤을 추듯 엉거주춤하였다. 둘다 널뛰기에는 소질이 없어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고 몸개그만 해대었지만, 둘은 뒤뚱거리는 서로의 포즈를 바라보며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몸개그를 마친 선재와 명주는 아기자기한 인형과 소품을 파는 곳에서 눈호강으로 하고, 꼬마들이 줄서있는 터키 아이스크림 옆에서 아이들을 놀리는 외국인 사장님의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선재는 태어나서 가장 즐거운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수제비누와 코바늘 수제품 코너를 구경하던 명주와 선재는 시끌시끌한 곳으로 눈을 돌렸다. 선재는 흠칫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식빵 수세미를 떨어뜨렸다. 갑자기선재가 명주 손을 잡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야, 우, 우리 저쪽으로 가보자.”
“나 이거 더 구경하고 싶어~”
“나 아까부터 저, 저기 궁금했어. 저기부터 가보자. 얼른.”
“안녕하셨어요, 아아멘. 아이고 오랜만이네. 콜록콜록. 잘 지내셨어? 반갑네. 할렐루야입니다.”
“네, 뭐.”
“다른 사람들 이거 다 주더만 나도 줘. 난 다섯 개 줘.”
“가세요.”
“아, 왜 이러실까. 초면도 아니고 나도 할렐루야 다시 믿는 사람 되고 싶다고. 얼른 줘봐요.”
“아, 좀, 가세요.”
그곳에서는 맨발에 슬리퍼, 낡은 티셔츠 한 장을 대충 걸친 흑빛 얼굴의 미자가 사람들과 실갱이를 하고 있었다.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역시나 담배를 끼우고 걸걸한 목소리로 부끄러움이란 처음부터 갖지 못한 사람처럼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 나도 좀 달라고오! 그럼 이것만 줘!”
“아휴, 정말! 선재엄마. 정신 좀 차려요! 변한게 없어!”
“아파요!”
미자는 깎지 않아 제멋대로 길어지거나 끊어진 손톱으로 저지하는 사람들 손을 긁어대며 기어이 교회 천막 좌판에 놓인 샌드위치 세트를 세 개 집어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미자가 무심코 눈을 돌렸을 때, 급히 어디론가 가고 있는 선재의 뒷모습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