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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따시 May 17. 2020

직관적 표현과 명확한 메시지

영화 [더 플랫폼] 리뷰

영화의 이야기는 현실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영화 [더 플랫폼]이 말하는 현실은 상당히 비참하기 짝이 없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영화가 표현하는 메시지와 상징을 모를 수가 없다. 그 메시지를 위해서 영화가 표현하는 잔인함과 혐오감이 과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트리마가시가 식사를 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당한 혐오감이 들게 한다. 생각해보면 해당 장면이 혐오감을 조정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표현하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저 먹다 남은 음식에 대한 표현만 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먹는 트리마가시의 행위에 혐오감이 드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누군가 먹고 남긴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렇기에 고랭이 처음 음식을 먹는 순간에 괴로워하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장면은 영화 내적으로 상당히 큰 아이러니를 만드는 장면이다. 영화의 첫 장면을 생각해보면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은 위생에 있어 상당히 민감하게 생각한다. 머리카락 하나가 들어가는 것을 큰 실수로 여기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러한 장면이 있었다는 것을 잊게 만든다. 그것을 통해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플랫폼이라는 수직 감독 속의 사람을 또한 그러할 것이다. 만약 모든 층들이 고정되어 있다면, 사람들은 음식을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음식이 안정적으로 공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랫폼 속 사람들이 매달 층이 바뀐다는 것이 이들이 음식에 미치도록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 달이면 이러한 음식을 못 먹을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보상심리가 작용하는 것이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음식을 먹는 장면이 더욱 탐욕스럽게 느껴지고 그러한 탐욕 때문에 혐오감이 더해진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탐욕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이다. 



영화가 이러한 잔인함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영화는 그것을 1차원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표현을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표현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이지만 이것을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잔인하고 혐오스럽게 느끼도록 만든 것이다. 


영화의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가자면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정말로 플랫폼의 관리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모르고 있던 것일까? 물론 극 중 인물의 대사를 보면 몰랐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녀의 경우 일개 직원이기 때문에 정말 몰랐을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설을 총 관리하는 관리자들의 이야기다. 추측컨대 이것에 대해 몰랐을 리가 없다. 매달 인원들의 층 수에 변화를 주면서 몇 층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 확실히 알 것이다. 그럼에도 방치한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그 이유는 플랫폼의 운영 구조를 생각해보면 가늠해볼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플랫폼이라는 공간은 효율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것이다. 음식을 나눠주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 음식을 한 번에 만들고, 차례대로 먹게 하는 것이다. 모두가 이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음식을 먹고 다음 사람에게 넘겼을 것이다. 거기에 음식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이러한 이상을 위한 장치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이상을 위한 실험으로 해당 플랫폼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실험대상이 죄수인 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능한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속에도 허점은 존재한다. 영화는 그것을 미하루의 아이로 표현하는 듯하다. 플랫폼의 직원은 이야기했다. ‘아이는 이 곳에 오지 못한다’. 그렇다면 미하루의 아이는 어떻게 온 것일까? 먼저 직원이 거짓말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직원이 얻는 이득은 무엇일까? 

아이는 외부로 들어온 것이 아닌 감옥 내에서 태어난 아이일 가능성이 크다. 미하루가 임신 중에 수감되었을 수도 있고, 혹은 감옥 내에서 원하지 않은 임신일 확률도 존재한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무게를 두는 편이다. 아이가 있던 공간이 플랫폼의 최하층이라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 근거가 될 것이다. 플랫폼의 구조상 어떠한 층에 있건 모든 사람이 방문할 수 있는 층은 최하층이다. 결국 두 사람이 함께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최하층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 중 하나일 것이라 보인다. 미하루는 자신과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강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고, 자신이 최상층으로 가더라도 자신의 아이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최하층으로 가야 했다. 그래야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미하루에 그녀의 아이는 최하층으로 가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과 함께 최하층을 알게 된 사람이 고렝과 바하랏이라는 것이다. 영화의 설정상 고렝은 다른 죄수들과 달리 자진해서 들어온 사람이다. 플랫폼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고렝은 또 다른 실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는 관리하는 집단이 플랫폼의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으로 고렝을 보낸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창기 고렝은 플랫폼의 시스템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하지만 쉽지 않았고, 그 또한 기존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 고렝이 두 번째 룸메이트인 이모구리를 맞이했을 때를 보면, 트리마가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녀가 음식을 배분하려고 하자 고렝은 쓸 때 없는 일이라며 그녀를 비웃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꾸준히 음식을 배분했고, 어느 순간 고렝 또한 그녀의 행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결국 고렝 또한 그의 행동에 누군가가 힘을 실어주었다면 조금 더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고렝의 이러한 깨달음은 영화 후반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그 실천을 함께하는 사람인 바하랏은 왜 그와 함께 했던 것일까? 이는 그가 흑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답을 내릴 수 있다. 역사적으로 흑인의 지휘는 낮은 곳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러한 차별 및 고충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앞서 이야기했던 미하루와 아이의 스토리와 연결되는 부분으로 보인다. 흑인, 여성, 아이는 기존 사회에서 낮은 계급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333층을 겪어본 유일한 인물로 표현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플랫폼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아무도 몰랐던 아이의 존재를 알아내고, 가장 아래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영화는 그것만으로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여태껏 그러한 시도를 아무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어른들이 문제점을 발견하고 개선하려고 하는 것으로도 그들의 임무는 다했다고 보인다. 이제 남은 일은 플랫폼 위로 올라간 아이가 플랫폼의 상황을 직관적으로 알리는 상징이 되는 것이다. 아이가 있어야 하지 말아야 할 곳, 그리고 아이가 없다고 생각되는 공간에 아이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사회적 무관심을 깨우는 듯하다. 


그들의 목적을 무엇이었을까? 실험일까? 혹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형벌인 것일까. 운영하는 입장에서 플랫폼이라는 구조는 상당히 효율적인 구조다. 좁은 땅에 위로 높이 세운 건물과 컨베이어식 배식은 상당히 효율적인 운영방식이다. 거기에 형평성을 위해서 매달 층을 바꿔준다. 말만 들으면 상당히 이상적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효율을 핑계로 잊히고,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대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들었던 잔인함, 혐오감, 측은함 등은 단순히 영화만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라 본다. 

그리고 그것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올바름을 이야기하는 인물과 자신의 위치를 내려놓고 실행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는 그러한 이야기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고렝과 같은 사람이거나 그에게 협조하는 사람이거나 그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거나 알면서도 무시하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영화는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하나의 통지서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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