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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공 Sep 01. 2020

파출부를 해서라도 학원에 보내줄게!

[일일딸공] 엄마의 못다한 이야기, 엄마에게 못다한 이야기

동네 이름이, 황금동이라고?? 

 국민학교 3학년, 동네 친구 중 몇몇이 수성구로 이사를 갔다. 학군이 좋은 곳으로 간다고 했다. 친구가 이사 간 동네가 수성구 황금동이란 말을 들으며 이름 한 번 노골적이구나, 감탄했다. 뭐 얼마나 좋은 동네길래 이름이 황금동이래! 엄마는 학군이 뭔 상관이냐, 너만 잘하면 된다고 했다. 요즘 인터넷에서 말하는 ‘될놈될’ 이론을 삼십 년 전부터 굳게 밀던 엄마. 근거보단 그냥 믿음이었다. 그때 황금동으로 이사갔더라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 가끔 궁금하긴 하다.      


니가 공부만 한다면 엄마가 파출부를 해서라도 학원에 보내줄게!      


 처음 키워보는 자식 교육 앞에서 학군은 필요 없다고 당당히 외치던 엄마가 항상 강조하던 꼭지였다. 교육비는 아끼지 않겠다는 지론. 물론 엄마가 생각하는 교육비의 바운더리는 피아노, 태권도, 미술 등을 가르치는 동네 교습소가 전부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영어 수학의 과외를 붙인다거나, 피아노 이외의 악기를 가르친다거나 하는 것은 처음부터 선택지에 없었는데, 이건 경제적인 이유보다도 어디까지나 엄마가 상상조차 해볼 수 없는 영역이었던 까닭이다. 엄마는, 철저히 당신의 기준에서, 자식 교육을 위해 한 몸 바칠 각오가 충만한 교육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엄마의 부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 집의 마당 아닌 정원은, 동네 부업인의 아지트가 되었다. 부업하면 당장 떠오르는 이미지는 먼지 나는 곰 인형과 눈알 봉지, 혹은 방안 가득 쌓여있는 종이봉투들이지만 사실 나에게 이건 드라마가 만들어준 그림일 뿐이다. 실제로 엄마가 했던 부업은 밤 까기나 우산 꿰매기 등의 훨씬 고급 기술이 필요한 것들이었으니까.      


 처음 시작은 밤까기였다. 어느 날 놀면 뭐하냐며 용돈이나 벌자는 옆집 아줌마의 한 마디에 시작된 부업. 새벽마다 집 앞으로 배달된 두어 자루의 밤을 온종일 까서 담아두면, 저녁 답에 걷어가며 비용을 지급하는 식이었다. 밤을 쉽게 까기 위해서는 자루째로 물에 담가 불려 둬야 했는데, 말간 물에 밤물이 들어가는 게 재밌어서 한참을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진하게 밤 물이 든 물은, 밤 맛이 날까? 엄마 몰래 살짝 찍어 먹어봤는데 아무 맛도 없었다. 실망...      

겉껍질만 까면 얼마, 속껍질까지 까면 또 얼마. 자루당 책정된 가격을 정확히 지급하는 밤 아저씨를 보며 역시 속껍질이 까기 어려우니 비싸네, 하고 중얼대던 기억.      


 두 번째,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부업은 우산 꿰매기였다. 당시 우리 집 근처에 협립양산이라는 우산공장이 하나 있었는데, 호시절 경기를 타고 일본에 수출까지 하는 회사라고 했다. 이 우산 제작의 꽤 많은 부분이 엄마와 같이 교육비라던가 반찬값 따위를 벌려는 이들의 손에서 완성되었다. 우산의 프레임에 해당하는 ‘살대’와 비를 막아주는 ‘천’을 묶음으로 갖다주면 살대에 천을 끼우고 정해진 위치를 꿰매어 우산을 완성하는 부업. 꽤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만큼 파격적인 가격의 부업이었다. 우산 개당 150원!      


 내가 3학년일 때부터 시작한 이 부업은 거의 4학년 말, 5학년까지도 계속되었는데 나는 엄마의 이 부업이 참 좋았다. 학교를 다녀오면 마당에 깔린 평상엔 엄마를 포함한 동네 아줌마들이 꼭 서너 명씩 앉아서 함께 우산을 꿰매고 있었는데, 학교 다녀왔습니다! 하면 온 동네 아줌마들이 다 같이 환대해주는 것 같았다. 집이 꽉 찬 느낌, 나는 그냥 이 느낌이 좋았다. 학교가 좀 일찍 마친 날이나 방학 때면, 엄마 옆에서 살대에 천을 끼우며 꼽사리를 끼기도 했다. 우산 살대에 천을 끼우고 꼭지에 나사못처럼 된 핀을 돌려서 한쪽에 쌓아 두면 엄마가 하나씩 받아서 꿰매기만 하는 방식이었다. 완성품이 하나에 150원이니까 살대에 천 껴주는 걸로 개당 50원은 받아야 한다고 우겨서 가끔 챙겨 받는 용돈도 쏠쏠한 재미를 더했다. 우산을 꿰매기 위해 실에 초를 먹여야 한다는 것도, 골무와 쪽가위를 알게 된 것도 엄마의 부업을 통해서였다.      


 요즘 우산은 실과 바늘로 꿰매는 대신 우산과 같은 재질의 스티커를 붙여 천과 살대를 연결해서 만든다. 어느 순간부터 안쪽 실밥이 사라지고 스티커가 붙으면서 우산은 더 약해지고 더 저렴해졌다. 이제는 어디서 한두 개쯤 흘리고 다녀도 등짝을 맞을 각오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런데도 나는 우산을 사면 습관적으로 펴서 안을 들여다본다. 개당 150원씩 벌어 학원비라도 대고 싶었던 엄마의 손길과, 온 마당이 북적거리던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가 매듭에 담겨 있지 않을까 눈으로 우산을 더듬는다. 


 엄마의 부업은, 작은 빌라로 이사를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실제로 엄마가 돈을 벌고 싶었던 걸까, 잘 모르겠다. 어딜가나 사람 만나길 좋아하고 웃음 많고 정 많던 엄마, 사실은 그냥 사람이 북적이는 그 느낌을 즐겼던 게 아닐까, 상상만 한다. 


 어디서든 너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엄마의 말은 그 시절 나에게 주문이 되었다. 학교 다녀오는 나를 반겨주던 온 동네 아줌마들의 환대, 배운 것 없지만 너의 교육만큼은, 이라는 엄마의 간절함. 초 먹인 실과 바늘을 잡으며 엄마의 손끝은 딱딱하게 굳어 갔고, 엄마의 주문을 부적처럼 새기며 나는 자랐다. 한없이 따뜻하고, 한없이 든든한 시절이었다. 


1990년 오빠의 생일 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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