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을 앞둔 내게 오라버니는 겁을 줬었다. 서울은 눈 뜨고 코 베이는 곳이라고. 그게 서울의 다는 아니지만, 어떤 점에서 그리 말했는지 나는 서울살이를 꽤 오래 하며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큰 동심이 돌 무렵 시골 신도시로, 작은 동심이 돌 무렵 바닷가로 왔으니 서울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 되어간다. 최근 작은 동심이와 단둘이 서울을 다녀올 일이 있었다. KTX와 택시를 이용하는 일정. 운전을 즐기는 아빠 덕에 기차를 처음 타 보는 작은 동심이는 흥분의 도가니였지만 (복에 겨운 줄 알아라), 나는 오랜만에 잔뜩 긴장했다. 소매치기도 당하기 싫었고, 가까운 길 두고 돌아가는 택시도 싫었다. 외지인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출발 전 어플로 지도를 보고 또 봤다.
드디어 진료가 끝났다. 안도감이 몰려온 나는 그제야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와 함께 병원을 빠져나왔다. 근처에서 간식을 먹고 서울역으로 향하는 택시를 탔다. 기사님과 대화 도중, 서울서 살았음을 어색하지 않게 내비치는 미션을 수행해가면서.
우리는 서울역 뒤편에서 내렸고, 새벽부터 시작된 강행군에 지친 작은 동심이는 깊은 잠에 빠졌다. 가방 두 개를 메고, 아이를 안은 채, 대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계단을 올라, 마침내 서울역 대합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이 누울 자리가 마땅찮다. 어쩜 빈자리가 하나도 없다. 어깨가 돌덩이가 되어가는 찰나, 전화벨이 울린다. 두리번거리다 건물 기둥을 둘러싼 도넛 모양의 나무 벤치에 아이를 불편하게 눕혔다. 쿠션 하나 없을뿐더러, 아이의 작은 몸을 일자로 받칠 수 없는 구조. 아이가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내 몸으로 막아 선 후, 좀 전의 발신번호로 전화를 건다.
병원이다. 내가 돈을 안 내고 와버렸단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아이 수술을 상담하러 간 자리였다. 극도의 긴장이 풀리자마자 아이 손잡고 그곳을 빠져나오기만 했다. 나조차도 어이없어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드리고 바로 송금했다. 소매치기도 안 당했고, 택시 바가지도 안 당했다. 그런데 병원비를 안 내다니. 촌뜨기 더하기 긴장은? 먹튀!
(덧) 정신없음의 연대기가 있다. 거기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이후에 아이 둘을 데리고 처음으로 내가 고속도로를 운전해 3차 병원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나는 다시 한번 먹튀의 기록을 경신한다. 아, 인생이 점점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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