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힘으로 바로 선 의자라고 생각했다. 착각도 그런 착각이 어디 있었을까. 장례를 치르고 본가로 온 첫날이었나. 업무 복귀 차 먼저 올라갈 남편과 잠깐 집 밖을 나왔다. 아빠와 함께 갔던 동네 카페, 아빠와 함께 했던 바로 그 테이블에서, 남편 품에서 무너져 내리며, 나라는 의자는 사실은 온 힘을 다해 부모님이 떠받쳐 주신 덕에 바로 서 있을 수 있었구나 비로소 생각했다. 아빠가 돌아가시자마자, 나는 균형을 잃고 휘청대는 의자가 되어 있었다.
부모님의 대단한 헌신과 사랑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아빠 생전에 그걸 표현하며 기쁨을 선사해 드린 기억도 물론 있다 (더 자주,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걸 후회한다). 하지만, 돌아가시고 나서야 느낀 아빠의 존재감은 그런 것이었다. 감히 자식이 되갚지 못할 부모님의 크신 은혜. 예전에도 지금도 나는 그런 부모가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할 정도건만. 그런 내 인식이 어딘가 잘못됐나 싶게, 가늠할 수 없을 거라 표현한 무한함조차 사실은 빙산의 일각이었나 싶게. 아빠의 존재가 그렇게 느껴진 거다.
그 카페에서 나는 아빠, 엄마, 그리고 큰 동심이와 함께였다. 겨울 방학을 맞아 아이와 함께 찾은 본가에서 우리는 동네 산책을 했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즐거이 시소를 탔고, 기꺼이 손을 잡고 걸었으며, 연을 날렸었다. 날씨가 받쳐주지 않아 잘 날지 않는 연에, 아빠는 공학도의 투지를 십분 발휘하여 여러 조치를 해주셨다. 그리고 몸을 녹이려 찾은 게 동네 어귀의 작은 까페였다. 노곤해진 동심이는 졸려했고, 하필 아기띠도 유모차도 없던 그날, 쇠약해진 할아버지는 손주를 업고 집까지 걸어오셨다. 다음 날 아빠는 체력적으로 힘에 부쳐 하셨다.
오늘처럼 홀로 잠 못 들고 뒤척이는 밤이면, 나는 그날의 아빠가 자주 생각난다. 약해진 등에 손주를 업고 앞장서시던 뒷모습, 손주와 마주 앉은 시소에서 눈가와 입가가 만나도록 함빡 웃으시던 모습, 누워 계신 당신 주변에서 뒹굴거리면서도 한없이 편안해하던 동심이를 바라보시던 그윽한 눈길도. 10살이 된 지금도 큰 동심이는 이따금씩 얘기한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그 앞에서 나 역시 같은 마음임을 얘기할 땐 내보이지 않던 눈물을, 오늘 같은 밤 나는 원 없이 흘린다. 그리고 눈물로 그리움을 달래 본다. 이 그리움이 부디 하늘에 닿았으면 한다. 못다 표현한 감사와 사랑의 다른 이름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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