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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쑤루쑥 Feb 19. 2023

완벽주의 선생님을 사양합니다.

큰 동심이는 숙제와의 전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굉장히 꼼꼼하고 집요하다. 매일 알림장을 어플에 올려주는데, 교과목 시간에 마쳤어야 할 과제, 따로 내 준 과제 등 과제별로 미제출 인원을 병기한다. 0명이 될 때까지.


이런 걸 했군, 이런 걸 해야 하는군. 그렇게 넘길 수 있다면 그 집 아이는 숙제를 잘 챙기는 거다. 큰 동심이는 미제출 명부에 자주 올라간다. 나라고 아이가 숙제를 제때 제출하는 게 싫을 리 없다. 도움이 필요한 부분은 도와주지만 (사실 이 부분도 이상하다. 어른 도움 없이 해낼 수 없는 숙제가 꽤 있다.), 과제용지를 안 가져오거나 다 한 과제를 제출하지 않고 들고 다니는 것까지는 내가 어쩌지 못하겠다. 독촉하다 잔소리만 늘고, 숙제보다 모자 관계 안 틀어지는 게 더 중요하단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리 아이를 비롯해 몇 명만 미제출이면 아이의 미숙한 수행 능력이나 덤벙거리는 성격을 떠올리련만. 20명, 15명이 뜨는 미제출은 도대체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30명이 조금 안 되는 학급 인원. 그중 절반 이상이 시간 내 못했다면 그건 숙제가 무리라는 거 아닐까. 그쯤 되면 미제출 카운트가 0이 될 때까지 집계할 게 아니라, 학급에서 다시 한번 그 부분을 가르쳐줘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다 못한 숙제를 넘어, 교사의 책무를 부모에게 떠넘기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한데, '학급 문화 만들기'에 진심이라 굳이 안 해도 될 여러 이벤트를 벌이는 아이의 담임 선생님을 솔직히 나는 이해 못 하겠다.


얼마 전엔 담임 선생님한테 연락이 왔다. 미제출이 몇 건 있으니 집에서 아이 숙제에 신경 좀 써줬으면 좋겠단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우리가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고 다녀온 가족 여행 중에 주어진 미술 과제였다. 당연히 면제인 줄로 알고 넘겼었다. 나머지 미제출은 일상적인 수준이었다(숙제를 안 낸 게 잘했다는 게 아니다. 그간 아이의 미제출 경향에 비추어봤을 때 크게 도드라질 게 없었다는 뜻이다). 하필이면 날 잡아 3차 병원에 간 날이었다. 집에 오니 8시. 서둘러 저녁 일과를 마치고 9시부터 12시까지 아이와 밀린 숙제를 했다. 졸린 눈 비벼가며 하느라 속도가 무척 더뎠다. 미술 숙제까지는 도저히 못 할 상황. 다음 날 선생님께 사과부터 했다. 정말 죄송하다고. 하루만 더 시간 주시면 미술 과제도 꼭 제출하겠다고. 그리고 여쭤봤다. 체험 학습 기간 중 과제가 면제가 아니라 소급이 원칙인지 궁금했다.


결론은, 원래는 안 해도 되는 거였다. 아래는 선생님의 해명이다. 아이가 미술을 좋아하지 않냐. 그래서 아이에게 할지 말지 물어봤더니 하겠다 그랬다. 그래놓고 안 해서 미제출에 넣은 거다. 아이가 무슨 색지를 골랐는지 다른 아이들도 봤다. 내가 강제로 시킨 거 아니다. 즉, 안 해도 될 숙제까지 아이를 불러다 굳이 하겠냐고 물어 숙제가 하나 늘었단 말이었다. 벽에 다른 친구들 그림이 있는데 자기 것만 없으면 속상할까 봐 그랬다는 선생님의 설명이 전혀 친절하게 들리지 않았다. 일단 자기 것만 없다고 속상해할 것 같지 않고, 그렇다 한들 즐거운 미술 숙제 대신 너는 즐거운 체험학습을 하지 않았느냐고 다독이면 될 일 아닌가. 평소 숙제가 버거운 아이에게 숙제 하나를 굳이 하나 더 지우는 것. 그건 교사 개인의 강박이었다. 평소 미제출 인원이 0명이 될 때까지 집계하는 완벽주의자였으니 말이다.


아이 숙제  좀 신경 써 달라는 선생님의 연락에 고개 숙이며 사과부터 했었다. 평소 켜켜이 쌓아 온 숙제에 대한 내 불만과 의심은 꿀꺽 삼킨 채. 그런 연락을 차마 다시 받고 싶진 않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땐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여전히 미제출이 좀 잦지요? 그래도 1학기 때보다 많이 좋아졌잖아요. 조금만 더 아량을 베풀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빌어먹을 소심병 때문에 선생님께 민원을 제기하진 못하겠지만, 나는 캐치한 아이의 발전을 선생님께도 꼭 알려드리고 싶다.


동심아, 오늘 미제출 과제 줄줄이 떴던데, 여기 너 있냐? 몇 개? 와 같은 대화가 오늘도 우리 집에선 오갈 것이다. 하지만, 이젠 당당히 모든 과제를 제출한 날도 있다. 게다가, 우리 집 '미제출 대마왕'은 이제 '미제출 청산'도 곧잘 한다. 그러니 이 더딘 발전의 유일한 목격자인 내가 힘이 돼주어야 할 일이다.





사진: UnsplashAlexander G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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