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말했다. 야!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그는 내 옆 좌석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다닥다닥 붙은 그 많은 자리가 차고도 남을 만큼 북적이는 병원이었다. 그리고 '야!'는 부인을 부르는 말이었다. 부인이 입을 떼고서야 다문화 가정인 걸 알았다. 부부는 딸을 데려왔다. 아이는 소변 검사를 명 받았다. 하지만, 소변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이가 가뜩이나 경직되어 있는 게 눈에 보이는데, 아빠는 아이에게 강압적으로 말했다. 네가 빨리 쉬를 해야 집에 빨리 간다고. 말투에 섞인 짜증이 대단했다. 부부는 아이에게 물도 먹여봤지만 결과는 시원찮았다.
그러다, 작은 동심이 일로 오래 병원에 머물러야 했던 우리 모녀가 화장실에 갔다. 옆 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옆 칸의 누군가가 같이 들어간 사람에게 자꾸 화를 내는 거다. 정확히 알아먹을 수 없는 말로. 처음엔 거동 불편한 어르신의 배변을 돕는 보호자의 성토나 독촉 그 비스름한 건 줄 알았다. 내가 못 알아먹은 사투리의. 먼저 나온 우리가 대기 좌석에 착석하자 화장실에서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건 아까 그 집 모녀였다. 씩씩거리는 엄마 뒤로 아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아이의 서러움은 그 큰 마스크도 가리지 못했다.
그 집 아빠도 사실은 딸아이 입에 맛있는 반찬을 넣어주는 다정한 아빠일 수 있다. 엄마 껌딱지인 아이가 엄마에게 기댔을 때, 평소에는 엄마가 아이 머리에 뽀뽀도 해주고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줄 수도 있다. 그 가정 나름대로의 행복과 따스함이 분명 존재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남의 육아를 함부로 비난하지 않으려 한다.
아빠와 엄마가 번갈아가며 날카로운 태도로 아이를 쑤셔댄 일이 우리 집에도 있었다. 한 사람이 예민하면 한 사람이 든든하게 버텨주는 역할 분담이 우리 집만 해도 무너진 지 오래다. 한 사람의 화가 배우자와 아이들에게 전염되고, 화가 돌고 도는 악순환을 나는 너무 잘 안다. 우리 가족도 어느 순간 어느 누군가에게는 저들 모습이었을 것이다. 내색은 안 했지만 오늘 본 다문화 부부가 야속했다. 그 집 아이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내 곁엔 그 아이와 다름없을 내 아이가 있다. 오늘 나는 많이 부끄러웠다. 그 부부보다 내가.
사진: Unsplash의Mikkel Be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