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은 죄가 없다.

나는 왜 프리랜서가 되었나

by Claire Kim

어떤 조직에도 욱여 넣지 못했던 ‘나’


“김**씨, 다 좋은데 이 보고서에 빨간 줄은 뭐지?”

내가 ‘조직의 일원’으로 존재했던 마지막 조직, 국제기구에서 내 상사에게서 들은 마지막 퇴짜이다. 지식경제부, 문화관광부, 교육부 각 부처 공무원들이 파견돼서 만들어진, 눈에 보이진 않지만 가장 보수적인 보고문화가 인에 박혀있는 조직에서도 나의 ‘반역자’기질은 수그러들지 못하고 보고서 결론에 희미하게나마 빨간 줄을 그어 놓는 족적을 남겼다. 난 부장님이 시간이 없으니, 자신이 읽을 중요한 부분만 하이라이트해서 작성하란 지침을 지켰을 뿐이었다. 보고서용으로 출력된 A4- 텁텁한 맛이 날 것 같은 흰색과, 숨막히게 구획을 그어놓는 검은색 활자들 사이에서 빨간색 보다 더 눈에 잘 띄는 색(순전히 부장님의 편의를 위해)이 있단 말인가?


대기업 삼성전자 홍보팀 사원을 때려 치고, 신재생 에너지 개발하는 중소기업의 해외 마케팅 대리를 때려 치고, 또 한번의 동일 업계 경력직 1주일을 때려 치고 어렵사리 들어간 국제기구

에서(사실 이 국제기구에서 합격 연락이 늦게 오는 바람에 떨어진 줄 알고 들어갔던 다른 회사에, 유학 간다고 핑계를 대곤 1주일만에 퇴사함) 나는 한국과 아세안연합 회원국과의 무역투자분야 교류 증진관련 업무를 8개월 간 하다가 프리랜서로 독립했다.


내가 대기업, 중소기업, 공공기관(국제기구)까지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조직(이후 스타트업 피칭 컨설팅까지 포함)을 다 경험해보기까지 5년 8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6년 채 안 되는 시간이 누군가에겐 짧은 시간일 수 있겠으나 나의 ‘반역’기질은 조직의 일원이란 틀에 갇혀서는 단 하루도 더 버틸 수 없는 시간이었다.

특히나 마지막 직장이었던 외교부 산하의 국제기구는 그때까지 내가 경험해본 최악의 구태와 비효율성과 불합리한 인사 정책과 관조직 특유의 책임 떠넘기기(꼬리자르기) 문화가 난무하는 최악의 직장이었다.(게다가 내가 입사했을 땐 설립된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시기)


무엇보다 ‘마녀’라 불리던 전 청와대 의전 담당 사무관 출신, 40대 미혼 여자 부부장의 횡포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데, 자기보다 어리고 예쁜 여자 직원들을 회의실 구석으로 불러서 온갖 트집과 협박을 일삼는 진상중의 진상 상사였다. 이 조직이 정말 희망이 없었던 것은 사무실 안에 어떠한 불합리한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책임을 안 진다는 것이었다.


6개월 길게는 1년 뒤 원래 자신의 부처로 돌아갈 파견 공무원들만 ‘장’(의사결정권자)자리에 배치했으니 이들이 자신의 복직 전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고 싶어 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돌아갈 보직 없이 퇴직 또는 스카우트돼서 온 기존 관리직들의 횡포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 또한 신생 조직의 온갖 시행착오와 난리부르스를 다 쳐내며 밤낮없이 일했는데, 정당한 대가는 커녕 위 부처의 예산 문제를 언급하며 인원조정 얘기가 나오던 날, 그리고 문제의 그 ‘회의실’에 들어갔다 나오던 날, 5년간 소심한 직장인으로써 살아온 삶의 종지부를 찍을 ‘반역’기질이 제대로 발동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경험한 최악의 조직인 바로 그 곳에서 열정화산(하고 싶은 일)이 폭발해 독립선언을 할 용기가 생긴데다 거기서 배운 ‘정통’외교부 의전관례로7년이나 ‘국제의전 실무’ 강의(수익을 떠나, 프리랜서가 된 나에게 주기적으로 주어지는 강의는 이후 엄청난 안정감을 주었다)를 써먹었으니 사람 일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보다 헤매기가 더욱 힘들었다.”

(김훈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중)

사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방송이란 매체에 동경과 환상을 갖고 있었고, (더 정확히는 아나운서란 직업) 자연스레 TV아나운서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전공을 선택해서 언론정보문화학부란 애매한 졸업타이틀을 달고 졸업학기엔 닥치는 대로 언론사 시험을 보러 다녔다.

노력하면 꿈을 이룰 것이란 기대(대학때 경험한 대학방송국과 지역방송 라디오 진행을 하면서 바람이 제대로 들었음)와 더불어 현실적으로 언론고시라 불리는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 일반 회사에 사무직에도 지원서를 넣고, 또 어찌 될지 모르니 장학금을 받고 유학 갈 수 있도록 토플 스터디도 하고, 언론고시 스터디도 하고 그야말로 대학 졸업반 인생 문어발 경영에 정신 없이 25살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정보통신총괄의 홍보팀에서 사내방송(지금은 없어진 SBC(삼성전자방송국))아나운서와 해외홍보를 전담할 특채공고가 났고, 카메라테스트와 영어시험을 따로 치르고 나서, 나는 ‘촉탁계약직’이란 타이틀을 달고 입사하게 되었다. 삼성전자의 일반 사원이기는 하나, 방송과 해외홍보를 겸할 수 있는 특별한 보직이었기에 사업장 내 방송만 계속 이어진다면 어릴 적 꿈이었던 아나운서를 이뤘다고 볼 수도 있는 (그리고 안정적인)직업을 가질 뻔 했다. 그러나 조직내의 파워게임에서 밀린 우리 부서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대기업의 숨막히는 조직문화에 너덜너덜해진 나의 자유로운 영혼은 결국 서울에 소재한 중소규모의 신재생에너지개발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다.

6년이 채 안되는 시간, 평범한 ‘회사원’으로 지내면서 누구나 다 아는 S전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벤처기업, 그리고 ‘글로벌’한 뉘앙스를 풍기는 ‘국제기구’까지 거치는 동안 조직원으로써의 내 삶은 한마디로 ‘죽을 것’ 같았다. 마음 속엔 늘 '심장이 뛰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따박 따박 들어오는 월급을 포기할 용기도 없었다. 기똥찬 재주도 없으면서 일상을 서서히 망쳐버리는 열정을 품고 지낸 시간이었다.

아침 7시 40분까지 출근해서 이미 7시부터 나와계신 부장님께 인사를 하고(내가 다닐때 s전자는 근무시간이 8 to 5였는데, 그전엔 7 to 4였고, 7시 전에 출근하는게 몸에 밴 상사들은 늘 7시반부터 도끼눈을 하고 계셨음) S전자 제일 구석 화장실에 숨어서 8시 업무 시작 종이 칠 때까지 지은 죄도 없이 벌렁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6개월은 매일 울었다. 그리고 어느 금요 일 밤 8시반, 아무도 없는 회사 사무실에서 스티브잡스의 스탠포드 졸업 연설을 유튜브로 보면서 키보드가 흥건해지리만큼 울었던 것 같다.

처절한 취업 전선을 뚫고 어디에 속해 있다는 것이, 그 때만큼 절실한 적이 없었을텐데, 그 절실한 만큼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부정하고 산다는 것이 그 때만큼 힘들고 답답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언론사 시험을 보러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다시 한번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의 ‘조직원’이 되었지만 내 안의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성공해보겠다는 ‘반역’기질이 잠재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서 앞서 말한 마지막 조직에서의 경험은 내 안의 진짜 모습을 누르고 압박하다가 더 이상 도망 갈 곳이 없어서 터져 버린 꼴이 되었고, 그 덕에 불안하지만 ‘오롯이 나’로 존재할 시간을 가지게 된 셈이다.

최근에 빨간색을 다시 한번 각인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겨울 옷을 정리하겠다고 옷장 문을 열었는데, 아뿔싸! 다홍색 여름 민소매 원피스부터 강렬한 붉은 색의 시스루 니트, 빨간색 가디건, 붉은 패턴이 난무하는 플레어 스커트등등. 옷장의 1/3은 빨간색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언제부턴가 무채색계열로 가득 채워진 백화점 겨울 의류 매대는 자연스럽게 패스하고 붉은색 니트만 모아놓은 곳에서 정신이 팔렸던 것이나, 휴대폰 액세서리, 지갑등은 당연히 붉은색으로 고른 것들이 기억이 났다.

붉은 색은 전통적으로 ‘부’와 ‘에너지’를 상징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중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색도 그래서 붉은색이라 들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붉은 기운에 이끌린건지도 모르겠으나, 프리랜서 선언 이후 회사에서 입기 편한(눈에 띄지 않는) 푸른색, 회색, 검은색류의 옷들을 잘 사진 않았던 것도 기억이 났다.



내 안의 반역 기질은, ‘빨간 색’이다.

피를 연상하는 폭력적인 빨간 색이 아니라, 생기와 에너지, 신선함 그리고

지루하지 않음. 변화가 반가운 색.

어떤 조직에도 들어맞지 않고, 나에게 맞는 시스템이 뭔지 나도 모르는, 구조에 나를 맞추는 게 불가능해서 뛰쳐나온, 쥐뿔도 없이 뛰쳐나와 세상을 향해 ‘나는 나다'라고 소리치는 우스운 허세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어려움을 딛고, 불안한 미래라는 단점을 뒤로 하고 프리랜서가 되어서 가장 좋은 점은, 더 이상 ‘나를 부정하며’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 길이 맞나 헤매고 마음 쓰며 자책하는데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얼마 전 여의도에서 가장 큰 은행 지하 주차장에 10여분을 서있게 되었다. 아뿔싸! 거의 빈 곳 없이 빼곡히 들어선 차들을 보고 있자니 이건 흰색, 회색, 검은색의 그라데이션 색상표가 따로 없었다. 흰색도 거의 보이지 않고 옅은 회색, 조금 더 진한 회색, 실버 그레이, 펄 그레이, 무광 그레이 등등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질감, 채도의 회색들은 다 모여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날 따라 파란색 계열도 전혀 없었다. 무결점의 회색 그라데이션의 향연이라니. 그리고 강렬한 존재감의 검은색들. 차종, 크기와 상관없이 무채색이 주는 에너지 한가운데에 있자니 헛 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 얘길 옆에 있는 남편에게 했더니 이 주차장을 2년 넘게 다닌 남편은 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 죄다 회색에 검은색이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뿌듯해졌다.


무채색 사이에서 불편감, 이물감을 느끼는 나의 반역기질.


프리랜서 10년차.

빨간 색은 죄가 없다.





Photo by George Shervashidze from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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