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면....?
<난생처음 들어가 본 명품 매장에서 생긴 일 1부>
안 믿길 수도 (?) 있지만, 어제 백화점 명품관 이란 데를 처음으로 들어가 봤다. 그것도 우리나라 백화점 매출 1위(작년 기준 3조원)라는 강남 신세계 백화점의 누구나 다 아는 L 브랜드에.
그동안, 백화점 명품 매장에 발을 한 번도 안 들인 데는, 내가 엄청 검소해서가 아니라 안 살 건데 '살 것처럼 굴어야' 하는 게 너무 신경 쓰이고 버거워서(?)였다. 그래서, 한 두 개 있는 가방도 아웃렛 사이트에서 영혼까지 끌어다 쿠폰을 먹여 구매한 것들이다.
매장에서 직접 그렇게 비싼 물건을 살 일이 여태껏 없었거니와, 온라인보다 비싸다는 단점을 이길 명분 (한정판, 온라인 재고 없음 등등)도 없었다.
그래서 굳이 매장까지 들어가서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 하는 게 매장 직원에게 못할 짓(?) 같아서 가보질 않았다. 어쩌다 지나가다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가격을 올리는 브랜드라고, 한국 소비자는 호구냐고 욕을 하면서도 대기줄이 길게 늘어 선 걸 보면 괜히 심사가 꼬여서 구경할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고가 물건에 관심이 없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잠깐 예쁘고 말 것들 말고 좋은 소재로 오래오래 들 수 있는 가방, 옷, 신발에 점점 더 눈이 가는 데다 한 달에 한번 호르몬의 노예가 되면 영락없이 자잘한 소품들이라도 사게 되는 버릇은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막내 딸내미가 '하츄핑' 스타일로 지은 나의 별명은 무려 '쇼. 핑.'이다. 마음만은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는 내가 자랑스럽거나 좋아할 별명은 전혀 아니지만, 딱히 반박도 할 수 없는 채, 나는 예쁘고 좋은 물건들에 대한 탐닉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L브랜드에 행차하게 되었다.
L브랜드 가방을 사진 않겠지만, 제일 좋다는 가죽으로 만든 가방은 얼마나 좋은 건지 손으로, 눈으로 '뜯고 씹고 맛보고'를 해봐야 노트북과 A4 서류와, 미팅 때 갈아 신을 하이힐까지 들어갈 '튼튼하고 세련된' 가죽 가방을 고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여겨보고 있는 디자인과 제일 비슷한 가방을 L브랜드에서 판매한다길래 큰맘 먹고 나섰다.
(사실, 인터넷에서 구매한 가방을 몇 번 반품 엔딩으로 끝내고 난 뒤 직접 가서 '구경' 할 명분이 쌓였다.)
강남 신세계 백화점 2층엔 L브랜드뿐만 아니라, 샤넬, 에르메스, 발렌시아가, 셀린느 등등 온갖 명품 매장들이 모여 있는데 2층을 처음 와보니 L브랜드 입구조차 찾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L브랜드라고 쓰여있긴 한데, 가방은 안 보이고 백화점 VIP들만 들어갈 것 같은 다소 작은 입구만 보이길래 (입구 장식의 화려함에 위압감을 느끼며 살아생전, 이 공간에 올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확히 십여분 뒤에, 이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나에게 생긴 일이란...) 미어캣처럼 고개만 빼꼼 내밀고 보다 한 바퀴를 돌고 가방이 보이는 입구로 들어섰다.
'소소하게' 내가 원하는 디자인의 가방만 딱 한번 보고 나올 생각이었던 나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의 '한갓진' 평일 낮 시간 명품매장 방문 계획이 틀어졌음을 알게 됐다.
간절히 '혼자' 눈팅만 하고 싶었던 나에게 입구에 서있던 'customer adviser'란 명함을 단 한 여성 매니저가 어떤 상품을 찾느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자신이 상품 설명을 도와드리겠다며 전담하고 나섰다.
몇 백 명이 있는 행사장에서도 안 떨리는 나는, '살 생각이 1도 없는' 나의 '음흉한' 계획이 들킬까 봐 마음속으로 긴장 버클을 채웠다. 20대 중 후반쯤 됐을까...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잘 교육받은 sales person의 아우라를 풍기는 매니저분은 내가 고른 가방을 펼쳐 보이며, 나에게 어울리는 가방을 설명하는데 진심이셨다.
나는 그분이 내놓는 가방의 가죽 질감과 무게, 색깔, 부착된 장식의 작동법까지 열심히 '공부'하듯이 반응했다. 그 매니저분은 모르셨겠지만 두 번째 가방까지 나오니 나는 누가 누굴 '응대'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다른 색깔도 보시겠냐고 권하며 아이패드의 상품 설명서를 열심히 넘기시는 매니저분을 더 귀찮게 해 드려선 안 되겠단 생각에, '가방이 너무 맘에 드는데, 좀 생각을 해볼게요'란 고전멘트를 날리고 있는데, 매니저분은 나에게 "어머! 명함을 거기다 끼우신 거 너무 귀여우세요!" 라며 불쑥 20대의 바이브를 날리셨다.
서비스 직종 15년 차인 나는, 그 매니저분이 날 보자마자 주신 명함을 내가 매고 간 핸드백의 로고 사이에 끼워 넣었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서비스 직종에 있는 분들에게 명함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에 바닥에 떨어트리진 말아야겠다 싶어서 무의식 중에 한 행동이었다.
왜 큰 가방이 필요한지 설명을 하면서 이미, 나는 이 매니저에게 나의 특이한 직업을 구구절절이 노출하게 되었다. '통역을 할 때가 있는데, 노트북을 넣어야 하고, 자료가 들어가야 하고, 격식 있는 자리엔 꼭 구두를 신어야 해서, 구두도 넣어야 하고, 텀블러도 넣어야 한다.' 등등등 "어머, 목소리가 너무 좋으시던데 어쩐지,,, " 까지 나오자, 이 매니저분에게 나는 수요일 오후를 찾아온 '가방을 꼭 살 것 같은' 통역사이자 성우인 프리랜서 고객님이 되었다.
내가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가 아닌, 고객사 미팅이나 약간의 긴장을 한 상태에서 나오는 '오피셜 한 모드'가 있는데, 그럴 때 나오는 나의 목소리와 아우라가 어떤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매니저 분에게 내가 '진상'이 되고 싶지 않은, 예의 바른 고객의 페르소나에 몰입할수록, 이분에게는 '전문직 프리랜서'에게 딱 떨어지는 상품을 잘 권해서 '실적'을 올릴 가능성이 높은 고객님이 돼가고 있었다.
다소 가격이 높은 가방을 사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새 상품을 싸고 있는 '더스트백'과 그 안에 빵빵하게 쌓여있는 종이와 포장재들을. 나에 대한 기대(정확힌, 나의 씀씀이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게 느껴질수록 마음속으로는 '빨리 여길 벗어나야겠다'라고 다짐하며 매니저와 함께 가방 딱 두 개에서 터져 나온 그 많은 포장재를 다시 주섬 주섬 넣고 있는데 ("어머! 안 그러셔도 되는데!!"를 연발하심), 그래도 백화점 간답시고 시어머니가 주신 파란색 보석이 박힌 반지를 끼고 있던 내 왼쪽 손가락을 본 매니저가 말했다.
"어머, 고객님, 반지 너무너무 예쁘네요. 진짜 특이하고요. 이런 유색 반지 좋아하시면, 저희 매장에 주얼리 섹션도 한번 보시겠어요? 저희가 전 세계에서 딱 3개밖에 없는 파인 주얼리 매장이 있거든요. 오늘 오랜만에 나오셨는데 (백화점에 자주 오시냐고 물었는데, 아뿔싸.... 내 입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운동 삼아 구경 온단 말 대신 '가끔' 온다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고객님이 좋아하실만한 상품들이 있어서, 한번 보고 가시면 좋을 것 같아요. 엄청 바쁘시다가 겨우 시간 내서 나오신 건데,,,"
" 아...... 네...(저... 기... 엄청 바쁘고 싶은데 그렇.. 진 안..) "
분명히 나의 계획은, 얼른 여길 떠나서 맘 편히 식품 매장에서 새로 나온 치즈를 구매할 생각이었는데 이상하게도 Customer Adviser가 된 지 얼마 안 되신 것 같은 이분의 열정과 기대를 꺾으면 안 될 것 같은 사회생활 선배로써의 '의무'(?) 감이 생겼다. 더욱이 내가 매장에서 직원들을 '귀찮게'하고 싶지 않단 건 순전히 내 입장이고 이분들은 고객을 응대하면서 경험과 능력을 쌓아가는 기회이지 않나라는 '기적의 논리'마저 등장했다.
그래서, 나는... L사의 전 세계 3개밖에 없다는 그 비밀의 주얼리 방에 들어가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