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알이 열리는 나무

by Claire Kim

5월, 요즘 나의 시기, 질투의 대상은 이팝나무이다.


겨울엔 아파트 단지 내 나무들의 앙상하고 초라한 가지들이 귀신 머리 마냥 헝클어져서 축 늘어져 있는 모양새가 음산한 기운 마저 내뿜었었다. 한 겨울의 혹독한 바람이 할퀴어 갈 때 마다 나는 나무들을 동정했다.

딸 아이에게, ‘나무는 같은 자리에서 도망도 못 가고, 비바람을 다 맞아가면서 새 봄을 기다려야 한다’ 며, 수목의 인생은 완벽하게 억울한 피해자의 운명인 양 주접을 떨었었다.


그러나, 3월의 따뜻한 봄 햇살이 들기 바쁘게 귀신머리 헤쳐 놓은 듯한 나무들이 어찌나 신속하게 연둣빛 옷으로 갈아 입기 시작하던지, 매일 매일 달라지는 색깔에 넋을 놓으며 약속이 있어 나가는 외출 길에도 한참을 쳐다보곤 했다.


산과 들의 나무들이, 길가의 가로수들이 짙은 암녹색이 되기 전, 개나리 색이 옅게 들어간 연둣빛 옷을 입는다는 사실을 나는 나이 마흔이 넘고서야 알게 되었다. 나뭇잎 사이사이 연둣빛과 옅은 녹색 사이의 그라데이션이 바람에 춤을 출 때 마다, 겨우내 나의 오만한 동정을 얘네들이 들었으면 얼마나 코웃음을 쳤을까, 가을에 절정을 이룰 화려한 색을 생각하니 아찔해지기까지 했다. 매일 달라지는 나뭇잎 옷 색깔에 나무 입장에서 보면 일년 내내 게으름 한번 못피우고, 나무의 시간으로는 얼마나 바쁘게 지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5월이 되고, 연둣빛이 다 사라지자 이팝나무에 쌀 열매가 펑펑 터지기 시작했다. 유난히 추운 날이 많았던 4월을 지나면서 나무들도 언제 꽃을 피워야할지 헷갈리는 것 아니냐고 수요 없는 걱정을 했었는데 5월의 이팝나무는 대자연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인간의 기억은 '생존'과 관련된 것들이 고착화되면서 진화했다는데, 인간 뿐 아니라 식물도 억겁의 세월을 거치며 살아남는 동안 나무는 나이테에 '생존의 기억'을 새겨놓았다 생각하니 눈 앞에 쌀 열매를 주렁 주렁 달고 있는 나무가 숭고해보이기까지 한다.


백미의 일종인 맵쌀을 함경북도 사투리로 이밥이라고 한다는데, 그 이밥이 나무에 열렸다 해서, ‘이팝나무’라고 불린다는 이 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누군가가 햅쌀을 가득 넣은 압력솥을 나무에서 터트린 마냥, 가지가지마다 흰 쌀이 지천에 널린 모양이다. 서양 사람들이 보면, 누군가 팝콘을 나무에 잔뜩 터트렸다고 느끼려나…썰렁한 농담을 속으로 혼자 주어 삼킨다.


굶어 죽는 사람이 허다했던 그 옛날에, 굶주린 사람들은 하얗고 길쭉한 꽃잎의 모양을 쌀처럼 여기고, ‘맵쌀나무’라고 부르며 나무를 볼 때 마다 마음이라도 배부르길 바랬을 것이다. 나무들은 혹독한 겨울에서 살아 남아 바쁘게 새 순을 틔우고, 부지런히 잎을 키워서 입이 떡 벌어질 만큼의 풍성한 꽃을 피우는 자신의 운명을 군말 없이 바쁘게, 충일하게 ‘제대로’ 해낸다. 이런 나무들 중에도, 보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배를 불렸다는 이팝 나무는 내 시기 질투의 대상 중 단연코 일등이다.


내 미래의 문은 자꾸만 닫히는데, 내 현실의 이팝나무는 찬란하다. 겨우 내 헐벗고 피폐 해지는 동안 욕심에 쩔은 인간들의 동정 따위는 하찮게 무시하고, 자신만의 시간과 방식으로 차근차근 인고의 열매를 맺어 보는 것만으로도 결핍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마음을 풍성하게 채워주는 참으로 충만한 삶이다.


나무의 생애를 지켜보면서, 저마다 무르익을 때를 생각한다. 바쁘지 않으면 내 가치가 소멸될 것 같아서 늘 분주하고 조급하고 종종걸음으로 사느라 내 가까이 이렇게 충만한 삶을 사는 존재가 있다는 것 조차 모르고 살았다. 몸이 아프고, 일이 성글어질 때에야 제 가끔의 시간을 견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깝게 느껴진다.


지난 한 계절 동안, 나는 바삐 바삐 꽃을 피워 대는 나무들에게 ‘나의 삶은 결핍으로 가득한데, 너의 삶은 찬란한 성취로 가득하구나’ 하며 시기와 질투를 해댔다. 작렬하는 태양에 꽃들이 다 사그러지고, 매서운 암녹색의 잎으로 중무장하기 전에 소심하게 말을 건네 볼까 한다.


‘너의 충만한 삶을 내게 나눠줘서 고마워…나도 나의 시간을 너처럼 영글어 볼 수 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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