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둑-, 툭! 투두둑-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미적지근했던 여름의 장마와는 달리 제법 차가운 것이,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비였다.
산과 산을 돌아다니며 풀과 나무를 깨우고, 때가 되면 재우는 일을 도맡아 하는 신인 ‘나무아래’가 걸음을 서둘렀다. 가을비가 오는 것을 보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여름이 끝나기 전에 떠났어야 했는데 올해는 좀 지체했어.’
그래도 그 맑은 미소를 봤으니 다 괜찮다, 싶기도 했다. 됐어. 그녀가 행복하게 웃는 것을 봤으니.
나의 소녀, 나의 여인. 연아.
곱디고운 약지에 끼워준 싸구려 옥가락지를 신기한 듯 이리저리 돌려보다, 손을 들어 햇빛에도 비춰보더니 반짝이는 가락지보다도 더 빛나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던, 나의 혼약자.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그때를 다시 떠올리기만 했는데도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아, 또 보고 싶다. 나무아래의 걸음이 느려졌다. 의무고 뭐고 다시 돌아가고만 싶었다. 몸이 연아에게 묶인 것처럼.
‘안되지.’
다음엔 돈이란 것을 더 모아서 더 귀한 것을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고개를 털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미묘하게, 주변을 감싼 시간의 흐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착각인가?’
나무아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떨어지던 빗방울도 그 자리에 멈췄다.
착각이 아니었다. 신력. 이건 신의 힘이다. 느낌이 좋지 않아. 나무아래가 입술을 짓씹고는 허공에 대고 물었다.
“누군데.”
‘나야. 우리 할 이야기가 있지 않아?’
고혹적인 목소리가 머릿속에 직접 울린다. 천신, ‘구름너머’였다. 나무아래는 인상을 썼다.
“나 바쁘다.”
‘그 계집아이, 목을 비틀어버리기 전에 당장 오는 게 좋을 걸.’
나긋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까칠한 말투가, 그녀가 단단히 화가 났음을 알려주었다.
‘느낌이 좋지 않더라니.’
“하.”
나무아래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구름너머의 신력은 신들 중 최고였다. 그리고 성질 더럽기로도 최고였다. 그녀가 진짜로 연아에게 무슨 짓을 하기 전에 꼼짝없이 신계로 가야만 했다.
나무아래는 욕지기가 나오는 것을 억누르며 신계로 가는 문을 열었다.
저벅-
신력을 실어 내딛으니, 그 한 걸음에 세상이 뒤집혔다.
신계에는 온갖 진귀한 꽃들이 햇볕에 잘 말려진 뽀송한 구름 위에 융단처럼 피어있었다. 밟고 선 자리에서 꽃줄기가 꺾이는 느낌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으나, 나무아래는 별 감흥 없이 그것들을 지나쳤다.
이딴 것보다, 연아와 노닐던 산의 작고 아직 이름조차 없는 풀꽃이 더 귀했다. 그것들은 나의 연아가 사랑하는 것들이니까.
나무아래가 커다란 나무옆에 멈춰 섰다. 저편에서 거대한 신력이 다가오고 있었다.
튼실하게 솟아오른 나무마다 향긋한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는데, 고운 비단옷을 걸친 구름너머가 맞은편 나무 사이에서 '걸어 나오며' 과일 하나를 똑, 땄다.
걸어, 나왔다.
나무아래는 그것이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구름너머는 언제나 나른한 자세로 누워 인간계를 내려다보곤 했던 것이다.
“빨리 왔네. 그 계집의 목이 퍽이나 중요한가 봐?”
구름너머는 복숭아 같은 과일을 한입 베어 물었다. 붉은 입술에 흐른 과즙을 새빨간 혀가 핥았다.
“혼약? 인간아이와 혼약?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네가 신경 쓸 일 아니다.”
“왜? 내가 널 원한다고 했잖아. 왜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잔뜩 날이 서, 발까지 구르려는 구름너머와 다르게, 나무아래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말했잖아. 난 처음부터 연아였어.”
그 말에, 구름너머가 기어코 손에 들고 있던 과일을 으깨버렸다.
“난, 난 천신이야!”
“알고 있어. 그리고 나도 신이지.”
둘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파지직!’, 둘 사이에 신력이 전기처럼 튀었다.
“고작 산이나 돌아다니는 주제에!”
구름너머가 신력을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네가 감히 천신인 날 거부해? 네까짓 것, 내 힘으로 여기에 묶어 둘 거야. 그 계집이 늙어 죽을 때까지! 그래도 그 입에서 그년 이름이 나오는지 지켜보겠어!”
나무아래도 신력을 모으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최강의 신을 상대로 이길 자신은 없었지만, 인간계로 도망갈 수만 있으면 된다. 구름너머 성격에 귀찮아서 거기까지 쫓아오지는 않을 테니까.
‘아주 잠깐의 틈만 벌 수 있다면!’
나무아래가 손을 뻗자 주변에 있던 나뭇가지들이 채찍처럼 늘어나 구름너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조급한 나무아래의 마음과 달리 그것들은 느렸다. 구름너머는 가볍게 팔을 휘저어 나무 덩굴 같은 그것들을 떨쳐냈다.
단번에 잡혀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이건,
‘너무 쉽게 쳐내는데.’
나무아래가 인상을 썼다. 그런데 구름너머도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이런 조악한 덩굴 따위로 내게 덤빌 생각을 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이라서, 나무아래는 아직 신력을 다루는 재주가 부족했다. 그래도 한 번만, 딱 한 번만 구름너머를 붙잡아 놓을 수 있으면 그 사이 도망이라도 칠 텐데, 자신을 구름너머보다 세상에 늦게 내보낸 하늘의 뜻이 야속했다.
‘하지만 이미 늦게 태어나버린 걸 어쩌겠어.’
나무아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무를 뻗었다.
휙! 휘익-!
그나마 조금씩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나무아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신력을 움직였다. 더 많은 나뭇가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만히 서서 나뭇가지를 쳐내던 구름너머도 슬슬 조금씩 움직여 피하고 있었다.
그녀도 나무아래의 신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지, ‘칫’ 하며 신력을 더 뿜어냈다. 이리저리 피하는 것마저 귀찮아진 그녀가 모습을 아예 구름으로 변화했다. 이번에 혀를 차는 것은 나무아래였다.
“쳇.”
이러면 잡기가 더 어려워지는데.
구름들은 이리저리 모양을 바꿔가며 나무 덩굴을 피했다. 그 사이 구름 조각중 하나가 살며시 빠져나와 집중한 상태의 나무아래에게로 몰래 다가갔다. 나무아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구름이 뭉쳐있는 곳에 나뭇가지를 뻗어냈다.
'이번엔, 구름 한 자락이라도 잡힐 것, 같은데!'
그러나 어느새 나무아래의 머리 위에 자리 잡은 작은 구름은,
콰지직!!!
그를 향해 번개를 내리쳤다. 번개는 신을 죽일 정도로 크진 않았지만 신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기엔 충분했다.
숨을 몰아쉬며 굳어 있는 나무아래에게, 천신이 언령을 담아 고고하게 선언했다.
“너를 사로잡아 여기에 묶어두려 했던 마음이 변했노라. 감히 천신인 내게 맞선 신, 나무아래의 기억을 봉인하겠다. 어디 그리해도 그토록 대단한 마음이 변하지 않는지 두고 보자꾸나.”
신들 중 가장 강한 천신의 언령은 술식이 되어 나무아래의 몸 주변을 사슬처럼 감쌌다.
나무아래는 마치 무거운 구름을 전신에 뒤집어쓴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기억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가장 소중한 것들이, 연아와의 기억이, 깊은 바닷속에 빠뜨린 것처럼 주워낼 수 없이 까마득해지고 있었다.
이겨놓고선 자존심이 무너져버린 표정을 드러내고 있는 구름너머, 그녀가 낯설었다. 모든 것이, 낯설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기억이 봉인되고 있었다. 나무아래는, 살면서 기억의 문이 닫혀감을 이렇게 몸소 느끼게 될 줄 몰랐다. 그것은 지독한 두려움이었다. 순간 퍼뜩 놀라 왼손을 내려다봤다.
섬세하게 얽혔던 풀꽃반지가 파스스 사그라들었다. 연아가 옥가락지의 답례로 엮어준 것이다. 신력을 써서라도 영원히 간직하겠다고 맹세했던 것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나무아래의 눈이 간절함으로 부릅떠졌다.
'잊으면 안 돼. 잊을 수 없다. 절대로!'
오른손을 힘겹게 들어 올려 뾰족한 나뭇가지처럼 자라난 손톱으로, 이미 사그라든 반지, 그 자리, 왼손 약지를 있는 힘껏 그었다.
'여기에 있었어. 내 소중한 것이, 잃어버리면 안 될 마음이.'
붉은 피가 눈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고개를 들었을 때, 언제 와있었는지 모를 '깊은숲속'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왜 그런 눈을 해. 그러지 마.'
나무아래는, 기억과 함께 흐릿해지는 눈을 감았다.
연아야. 연아야.
이제 못 갈지도 모르겠다. 미안해.
***
올해 겨울은 유난히도 건조했다. 마을의 누군가가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불이 번진 모양이었다. 삽시간에 온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고는 이제 마을 뒷산까지 태우려는지 거대한 화마가 연아의 바로 뒤까지 쫓아 들었다.
연아의 오두막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건조한 날씨덕에 약초가 썩은 것도 없이 잘 말랐다고 기뻐하며 보자기에 가지런히 정리해 두는 중이던 연아는, 마을의 바싹 마른 초가집들이 불타고, 산아래까지 불길이 번져왔을 때에야 불이 난 것을 알게 되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일단 약초 보자기라, 그것만 들고 불을 피해 달렸다. ‘그’가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산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로 가라고. 무슨 일이 크게 생긴 지금, 그의 말만 계속해서 반복되어 머릿속에 울렸다.
“그 나무로 가야 해.”
지난 여름 그와 혼약했던 그 커다란 나무 앞까지, 연아는 계속해서 뛰었다. 하늘도 야속하시지. 바람까지 불을 떠미는 기분이었다.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고, 매캐한 연기가 들러붙었다. 턱끝까지 숨이 차올랐지만, 계속해서 다리를 움직였다. 마침내,
“도착, 했다……. 하아.”
연아는 나무 밑동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등 뒤를 받쳐주는 나무가 든든하게 느껴졌지만 그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불에 타 죽는 건가.
‘모르겠다.’
더는 피할 곳도 없었으니까. 연아는 보따리를 끌어안고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어느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차가운 바람이 열기를 몰아내었다. 불은 나무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하나, 둘, 눈송이가 흩날렸다. 긴장이 풀리니 잠이 쏟아졌다. 잠들면 안 되는 걸 알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이 이불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눈꺼풀이 바위처럼 무거웠다. 스스로 뺨을 때려봐도 소용없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내려갈까? 하지만 어디로? 집도 마을도 다 불에 타버렸을 텐데.’
어찌할 줄 몰라 울음이 날 것만 같았다.
‘……미안해. 기다리지 못할 것 같아. ……나의, 나무아래.’
기절하듯 잠이 들어버린 연아의 위로, 나무뿌리가 조금씩 움직이며 낙엽을 모았다. 모인 낙엽이 따뜻하게 연아를 감쌌다. 그리고는 나무 밑동이 쩌억 갈라져, 연아를 삼키듯 품었다.
쿵-
나무가,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