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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홍차 Nov 14. 2024

나를 잊은 신이 재벌이 되었다. 15

15.

 연의 눈앞에서는 지금 송연아가 맑게 웃으며 룸으로 가자고 하고 있었다. 호텔에서 룸으로 가자는 게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게 생겨서는. 


 ‘그렇다 해도 그대를, 내가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연은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잡을 생각도 못한 채 눈앞의 여인을 그가 머무는 전용 룸으로 이끌었다.


 마음이 급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지금 당장, 송연아를 데리고 침대로 가길 원했다.


 그러나 문이 닫히자마자 입술을 맞부딪혀오는 그녀의 아찔하도록 농밀한 향기가, 오히려 그의 정신을 퍼뜩 일깨웠다. 연은 서둘러 그녀를 밀쳐내고 물었다. 


 “……너 누구야.”


 그는 더러운 것을 닦아내듯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녀는 여전히 연아로 보였지만 그녀가 아님을, 송연아 특유의 풋풋한 들꽃향이 아닌 익을 대로 익어 단내를 풍기는 과실의 향기가 말해주었다. 왜 지금껏 알아채지 못했지? 이것은 무슨 황당한 일이란 말인가.


 눈을 비비고 찌푸려봐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송연아였고, 그는 그녀를 원했다. 


 “누군데, 그 얼굴을 하고 있는 거냐고!”


 연이 뒷걸음치며 소리쳐 물었으나 그녀는 계속해서 가까이 다가왔다. 


 “어머, 왜 그래? 나잖아.”


 송연아의 모습을 한 스칼렛 클라우드가 말했다. 그를 농락하는 게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연은 볼을 짓씹었다. 입안에 피맛이 돌며 정신이 좀 깨어나는 것 같았다. 역시 지금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저 여자가 술에 무언가를 탄 걸까. 너무 방심했던 모양이다.


 “꺼져. 당장.”


 “흐응, 내가 준 그 술을 마시고도 날 참을 수 있어? 정신력 하나는 대단해, 하여간.”


 “꺼지라고!”


 “왜? 겁나? 네가 먼저 날 덮치기라도 할까 봐?”


 “젠장!”


 연의 판단력이 다시 흐려지고 있었다. 술에 뭘 탔는지 몰라도 그것의 효과가 강력한 건 알겠다. 그의 몸은 끔찍한 꿈의 후유증을 잊어보려고 가끔씩 혼자 술을 들이부어 봤을 땐 결코 취하지 않는 몸이었는데 말이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런 게 바로 만취한 거구나’ 하고 깨닫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하남에 있어야 할 송연아가, 눈앞에서 나긋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안아달라고 보채고 있었으니.


 몸이 달아올랐다. 숨이 가빠졌다. 


 송연아, 송연아. ……연아야.


 ‘그거 알아? 내가 널, 얼마나 원하는지.’


 그는 제멋대로 그녀에게 향하려는 몸을 자제하느라 눈에 핏줄이 섰다. 깨문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샜다.


 “하. 하하.”


 멍청이. 누구와 술을 마셨는지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했다. 스칼렛 클라우드라고 했지. 평범한 인간이 아닌 것이다. 그녀가, 송연아의 얼굴을 하고 날 유혹하고 있었다. 


 저 여자에게서 멀어져야 해. 여기를 벗어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안아버리고 말 거야.


 그래. 저 여자가 나가지 않으면 내가 나가면 되는 거지. 문득 생각한 그는 그녀를 내버려 둔 채 룸에서 뛰쳐나오려 했다. 왜 더 빨리 이 생각을 못했나. 그러나 그조차도 송연아를 두고 가는 것 같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을 생각지 못했다. 


 뒤돌아 도망치듯 겨우 걸음을 옮겨 문을 닫았다.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진 뒤에, 다시 룸으로 되돌아가게 될까 봐 얼른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고, 운전기사를 불렀다.


 당장 가야 했다. 연아가 있는 하남으로.


 곧 동이 틀 시간이었다. 지금 간다고 해도 나를 피하는 그녀를 만날 수나 있을는지, 확신은커녕 약간의 자신조차 없었지만 연아를 만나지 않고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것도 그 여자가 술에 탄 것 때문일까. 도대체 그 여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누구길래 송연아의 모습을 할 수 있는 거지.


 “하…….”


 다 소용없는 물음이다. 그런 쓸데없는 것보다 지금 당장 진짜 송연아를 품에 안고서 물어보고 싶었다. 별일 없었는지, 누가 찾아오진 않았는지, 그냥, 그녀에게 직접 확인받고 싶었다. 아니, 그저 얼굴만 보면, 되었다.


 “……최대한 밟아.”


 “알겠습니다, 보스.”


부아앙-


 그를 태운 차가 라 칼마 호텔에서 멀어졌다. 최상층 스위트 룸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스칼렛 클라우드, 아니, 구름너머가, 떠나가는 차를 지켜보다가 픽 웃었다.


 “쳇. 내 묘약을 먹고도, 그냥 가?”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한다.


 “짜증 나.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 넘어오네.”


 “그렇다기엔 꽤나 후련한 표정인데요, 누님.”


 어느새 스르륵 나타난 깊은숲속이 구름너머를 뒤에서 살짝 끌어 안았다.


 “그러니?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그녀는 깊은숲속을 돌아보며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거 옛날부터 인간들이 빌고 빌어서 한 방울씩 만들어 주던 건데 말야. 인간한테는 잘 듣는데 기억을 잃어도 신은 신이라고 쟤한테만 안 듣는 건지, 네가 한 번 먹어보고 확인해 줄래?”


 “이거, 그거죠?”


 “응. 앞에 있는 대상이 사랑하는 이로 보이는 데다가 몸이 동해서 미치게 만드는 거. 인간들이 ‘사랑의 묘약’이라고 부르던 그거, 맞아.”


 “어? 나더러 먹으라고요? 난 저 녀석처럼 참을 생각 없는데.”


 “어머, 너도 사랑하는 인간이 있는 거야? 누구니?”


 “……. 모르는 척하는 거예요, 정말 모르는 거예요?”


 깊은숲속이 구름너머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붙잡아 입을 맞췄다. 묘약 따위 안 먹어도 이미 한계인데. 그는 손을 휘둘러 신계로 향하는 공간을 열었다. 그리고는 구름너머의 손목을 잡아 꿀 같은 한 방울의 액체가 매달려있는 새끼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내가 누굴 사랑하고 있는지 자세히 알려줄 테니까 우리, 한 걸음만 자리를 옮길까요?”


 그 녀석 침대로 가기는 싫으니까.



***



 아침부터 연아를 찾아온 남자를 쫓아내기엔, 라 칼마의 회장은 이제 너무나 유명해서 신원보증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얼마 전 엄청난 조건으로 새로 계약한 새 주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연아를 찾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애타고 절절하여 김여사는 차마 그를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게 지금 그 커다란 나무아래에서 연이 연아를 만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여긴, 어떻게?”


 산 생활을 오래 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진 연아는, 매일 여기로 산책을 나오곤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가 왔으니. 놀란 눈으로 하얀 입김만 뿜으며 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연은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올라오는 길이 이상하게 너무도 익숙했다. 비록 그의 잔상에 남은 풍경은 녹음이 짙은 길이었으나, 지금의 앙상한 나뭇가지들도 어쩐지 이름을 다 기억해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연아…….”


 그중에서도 가장 익숙한 것은 이 나무 아래에 선 연아였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토록 바라던 그녀를 품에 안았다. 연아는 놀라서 바르작거리며 벗어나려 했지만, 그가 힘주어 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어줘.”


 하고 애절하게 부탁하니, 그대로 얼음처럼 굳을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여기에서……. 나무아래와 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면, 나더러 어떡하라고…….”


 연아는 그의 품에서 조용히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뜨거운 한여름의 태양볕에 섞인 풀내음, 나무 그늘에 불어 온 한 줄기 바람 같기도 한 그의 체향은…….


 “차라리 이대로 포기하면 편할까요.”


 연아가 눈물을 흘리며 한숨같이 속삭였다. 그걸 들은 연은 마음이 미어졌다. 나무아래를 포기한다는 말인가. 그럼 오롯이 나를 봐주겠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기뻐해야 할 일인데 왜 이렇게 슬픈 건지. 


 스칼렛 클라우드가 말한, 오백 년 만에 만난 ‘약혼녀’가 송연아라는 게, 지금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고작 스무 살의 연아에게 ‘실은 내가 오백 년을 넘게 살아왔어. 그 오백 년은 오롯이 기억하지만 그 전의 기억은 없는데, 내가 나무아래일 가능성은 없을까?’라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녀를 더욱 꼭 끌어 안았다. 이것밖에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끅끅, 눌러 참는 울음을 멈출 때까지 토닥여주려 했다. 오래 울면, 그건 그것대로 그녀를 오래 안고 있을 수 있으니 좋겠다는 못된 생각도 하면서.


 하늘을 가득 흐리게 만들던 구름이 포근한 함박눈을 내리기 시작했다. 둘의 머리 위로 한송이 두 송이 소복하게 눈이 쌓여갔다.


 어느새 차츰 잦아들고 있는 흐느낌이 아쉬울 정도로, 연은 연아를 품에 안은 지금이 간절했다. 그녀를 놓아줘야 하는 다음이 아쉬웠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말, 해야 하나. 내가 나무아래일 수도 있잖아. 그러면 내가 이 여인을 조금 더 안아 줄 있을 텐데. 미친 소리라고 비웃을지 몰라도 말을 하면 조금은 달라지려나. 


 연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만약,”


컹! 컹컹!


 “제노!”


 연아가 화들짝 놀라 연의 품에서 벗어났다. 


 ‘제노가 혼자 여기에 왔을 리는 없는데.’


 “연아씨! 괜찮아요?”


 아니나 다를까, 지훈이 목줄을 쥐고 제노와 함께 올라오고 있었다.


 “당장 연아씨에게서 떨어져!”


 지훈이 눈을 부라리며 연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왜?”


 연이 태연하게 연아를 다시 당겨 안았다. 연아는 자기도 모르게 순순히 끌려갔다가 이내 바둥거렸다.


 “놔줘요.”


 지훈이 끼어든 타이밍이 참 절묘했다. 연아에게, 내가 나무아래일지도 모른다고, 만약 그렇다면 기억을 잃은 나라도 받아주겠냐고 물으려 했다. 무슨 조화인지, 오백 년의 시간을 건너뛰고 내 앞에 나타난 그녀에게. 


 그러나 연은 팽팽히 당겨져 있던 긴장이 풀린 듯 ‘허’ 하고 바람 빠지듯 웃고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놓아주었다. 지훈이 연아에게 급히 다가가 그의 몸 뒤로 그녀를 숨겼다.


 그 모습이 제가 키우는 작은 동물을 지키려는 어린아이처럼 우습게 여겨졌다. 그래도 지금은 저 어린아이의 등 뒤로 숨은 작은 동물이 다시 그에게 다가올 생각이 없는 듯 하니, 아마 사라져 줘야 할 시간인 것 같았다. 매우, 아쉽게도 말이다.


끼잉-


 그가 지나가려 하자 제노가 귀를 젖히고 낑낑거렸다. 


 “그래, 너는 주인과는 다르게 싹싹하구나.”


 제노가 낯선 이를 경계하지 않고, 짖지도 않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지훈은 조금 놀랐다. 연아를 처음 만났을 때도 마구 달라붙고 핥고 난리를 치더니만, 이 녀석이 올해 갑자기 성격이 바뀌었나 의심도 되었다. 하지만 개에 관한 생각은 거기까지. 지금은 저 불청객이 얼른 사라져 주었으면 했다.


 때마침 지훈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연이 말했다.


 “아, 혹시 잊었나 해서 말하는데, 여긴 이제 내 땅이야.”


 그는 장난꾸러기처럼 얄밉게 웃고는 저벅저벅, 구둣발로 익숙하게도 산을 내려갔다.


 “눈이 와서 미끄러울 텐데…….”


 연아가 조용히 그를 걱정하는 소리에, 지훈은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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