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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홍차 Nov 05. 2024

나를 잊은 신이 재벌이 되었다. 14

14.


 “예? 이 땅이 팔린다고요? 이 집도요?”


 “하, 그 미친 라 칼마 회장이, ……아니, 그렇게 됐어. 그러니까 나랑 서울 가서 살자.”


 재경이 연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연아는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산이 그나마 나무아래를 기다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비록 나무아래와 똑 닮은 사람은 찾았지만 본인이 나무아래가 아니라고 하는 상황이니까. 여기서 진짜 나무아래가 나타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저는, 저는 갈 수 없어요……. 어떡하죠, 언니?”


 연아는 울먹이며 말했다. 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민폐를 끼칠 수도, 이대로 나무아래를 놓아버릴 수도 없었으니 머릿속과 마음속이 요동쳤다.


 재경은 그동안 연아를 지켜봐서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혼란스럽겠지. 그리고 아마, 이 일편단심 민들레 같은 녀석은 이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이참에 다 잊고 서울로 가서 나와 함께 재밌게 살길 바랐는데. 


 ‘에이, 할 수 없지. 괜히 욕심부려서 애 속만 상하게 했네.’


 라 칼마의 회장은 확실히 연아 때문에 이 땅을 그렇게 비싸게 사려는 걸 거다. 연아가 여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서야, 땅을 팔더라도 연아의 편의를 봐줘야 한다는 지훈과 재경의 부탁 아닌 부탁에 안석호가 조심스럽게 내건 조건을 덥석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이 땅에 무슨 골프장을 짓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계획까지 취소하면서 연아에 대한 소유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아야. 사실은, 라 칼마의 회장이 이 별장은 허물지 않을 거래. 원한다면 넌 여기서 계속 살아도 돼. 내가 너랑 살고 싶어서 먼저 얘기 안 했어. 미안해.”


 “어, 언니, 그럼 저 여기 계속 있어도 되는 거예요? 정말요?”


 “응. 정말.”


 연아의 눈에 방울방울 맺혔던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재경이 연신 미안해하며, 결국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린 연아를 달래주었다. 



***



 “보스, 하남 부지 매매의 법적 처리가 다 끝났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정말, 골프장 건설은 없던 일로 하시는 겁니까? 그 땅을 그대로 두기엔 아까운데요.”


 “내가 일에 관해 두 번 말하는 것, 봤어?”


 연이 그의 비서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또 다른 건은?”


 연이 묻자, 비서가 ‘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현재 두바이에 있는 ‘라 칼마 더 팜 호텔’ 부지 옆에 워터파크 개설 공사 진행 상황입니다. 기술제휴와 관련하여 미국에 있는 테마파크 전문 기업인 ‘파이브페어’ 측에서 이사 한 명을 한국으로 보내 보스를 만나고자 한답니다.”


 “굳이, 나를? 진행팀 있잖아. 최전무가 담당 아니었나?”


 “맞습니다만, 굳이, 보스를 뵈어야겠다고 했습니다.”


 연이 한껏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미팅을 최대한 빨리 잡아. 난 하남에 가서 할 일이 있으니까. 지금도 갈 생각이고. 매우 개인적인 일이니 무슨 일인지는 묻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비서는 연이 하남에 가서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얼마 전의 그 송연아라는 아가씨가 하남에 머물고 있다는 걸 기억해 내곤 ‘우리 보스에게도 꽃길이 열리나’ 하며 티 안 나게 웃고는 회장실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그 아가씨가 머물고 있는 별장, 허물지 않기로 했는데. 이거 완전히,


 “스케일이 남다르시네.”


 아무래도 골프장도 그 아가씨 때문에 날아간 듯했다. 시세의 열 배까지 주고 산 땅이 오로지 여자 한 명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건 그것대로 낭만적이지 않나.


 ‘하남에 가신다니까 차를 준비해 둬야겠군.’


 비서가 전화기를 들어 올리려던 때였다.


또각, 또각.


 묘한 향수 냄새가 그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을법한 파괴적인 아름다움의 이국적인 여인이 회장실로 직진하고 있었다.


 “어? 어어?”


 안되는데. 비서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들어갈게.”


 유창한 한국어로 회장실의 문을 연다. 비록 존댓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억양과 발음은 완벽했다. 생긴 건 완전 외국인인데 발음만 보면 토종 한국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 아, 안됩니다!”


 비서가 뒤늦게 뛰어가보았지만 늦었다. 그 뒤로,


 “누구.”


 보스의 담담하고도 낮은 음성이 들리고, 여인이 들어갔으며, 문이 닫혔다.



***



 문을 넘어 들어온 향이, 괜히, 이상하게 열받았다. 허락도 없이 남의 영역을 침범해 오는 냄새라니.


 “누구냐고.”


 연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차갑게 물었다.


 “아, 아직 얘기 못 들었어? 나 스칼렛 클라우드. 미국 파이브페어에서 왔어.”


 여인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파이브페어. 공식적인 미팅도 아니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올 줄은 몰랐지. 라 칼마를 무시하는 거라고 봐도 되겠지?”


 연도 픽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그건 아니야. 라 칼마의 회장이 그렇게나 대단하다고 난리들이어서 내가 보고 싶다고 조른 거야.”


 “아, 그래. 그래서. 직접 본 소감은?”


 “흠, 더 잘생겨졌달까.”


 연이 이마를 살짝 구겼다. 그 모습마저도 섹시한걸. 스칼렛 클라우드는 입술을 핥았다.


 “실은 옛날에 널 봤어.”


 “옛날에?”


 “응. 꽤 오래전 일이니, 넌 기억하지 못할 거야.”


 “하.”


 연은 코웃음 쳤다. 


 ‘내 앞에서 ‘오래전’을 언급하다니.’


 그는 오백 년 전 어느 날을 기점으로, 기억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뭐 얼마나 오래됐는지 들어나볼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말해 봐.”


 “어머, 흥미가 생겼나 봐? 흐응, 그냥 말해줄 수는 없고, 그럼 나랑 술 한 잔 해.”


 “그렇게까지 하면서 들어야 할 만큼 흥미가 돌진 않는데. 특히나 그쪽 하고는.”


 스칼렛이 풋, 웃었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겨 그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기억이, 필요할 텐데.”


 “……뭐?”


 “뭘 그리 정색해? ‘기억’ 필요하잖아? 나랑 만난 일이건, 뭐든 간에 말야.”


 연은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너 누구야.”


 “나? 스칼렛 클. 라. 우. 드.”


 “이름 말고, 정체를 말해.”


 “흐응? 그렇게 궁금하면, 가자니까? 한잔하러.”


 연이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뭐 이렇게 막무가내야. 짜증 나게 나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내칠 수도 없고.


 “그래. 가지.”


덜컥-


 연이 문을 열고 나오면서 비서에게 말했다.


 “차 대기시켜.”


 “자기, 나 이왕이면 라 칼마 호텔바에서 마시고 싶은데.”


 스칼렛 클라우드의 파격적인 말에 회장실 앞에서 대기하며 업무 중이던 비서진이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미친 말은 신경 끄고.”


 연이 비서들에게 말했다.


 “어머? 자기야. 나 거기 아니면 안  건데.”


 그녀는 한 술 더 떠서 육감적인 몸을 연에게 붙이며 팔짱을 꼈다. 연은 튀어나오려는 욕을 씹어 삼키며 고개를 꺾었다. 


 “알았으니. 그 빌어먹을 자기 소리는 집어치워.”


 “후훗!”


 스칼렛은 이겼다는 듯 손가락으로 승리의 브이를 펴보였다. 비서진들의 입이 떡 벌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연은 이대로 질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에게 붙잡힌 팔을 세차게 털어내 보았으나, 스칼렛은 끄떡없이 팔짱을 계속 끼고 버텼다.


 “보스. 차, 차 대기시켰습니다.”


 “하…….”


 연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 스칼렛을 팔에 매단 채 걸음을 옮겼다.



***



 “제일 독한 걸로 두 잔 줘.”


 스칼렛이 바텐더에게 말했다.


 “취하면 그대로 두고 갈 거니까 다른 마음은 없길 바라.”


 “흐응. 재미없어, 자기.”


 표정관리에 익숙한 바텐더마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 분은 라 칼마의, 이 호텔의 주인 아닌가. 곁에 앉아 묘한 표정으로 회장님을 바라보는 이 여자는 참으로 당돌하기 짝이 없었다. 단박에 제일 독한 술이라니. ‘정말로 드려요?’ 라는 눈빛으로 연을 바라보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짙은 호박빛 액체가 담긴 잔이 하나씩 앞에 놓였다.


 “이제, 마시고, 말해.”


 “안 그래도 어떻게 해야 자기가 안달 날까 고민 중이었는데 말이야. 결정했어. 자기가 한 잔 마실 때마다 하나씩 말해야지이.”


 연이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려 잠시 눈을 감았다.


 “그래. 내가 을이군. 거미줄에 걸렸어.”


 “이제 알았어?”


 연은 잔을 들어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본 채로 술을 넘겼다. 그녀가 여우처럼 눈웃음을 치며 잔을 같이 비웠다. 그리고는 선심 쓰듯 던졌다. 


 “기억.”


 “그래. 기억.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없잖아. 옛날의 기억 말이야. 난 분명 널 알아. 하지만 넌 날 기억 못 하지.”


 “증명할 수 있나?”


 “한 잔 더 마시면.”


 “바텐더, 같은 걸로,”


 너도 마시겠냐는 의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방긋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한다. 연은 바텐더에게 말을 잇는다.


 “두 잔 더 주지.”


 “예.”


 잔이 다시 놓이고, 다시 비워졌다. 연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 건드리며 ‘증명은?’ 하고 물었다. 스칼렛은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간 뒤 속삭였다.


 “우리가 만난 건, 오백 년 전이야. 넌 그 뒤로 기억을 잃었지.”


 “하!”


 다른 이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듣는 자신의 기억상실 이야기였다. 오백 년이 되었다는 것도 맞았다. 평상심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상하게 자꾸 살심이 솟구쳤다. 누구를 향해? 바로 옆에 앉아있는 스칼렛 클라우드라는 여자를 향해.


 “와우.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것도 오랜만인데. 한 잔 더 할래?”


 더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끝까지 해 봐. 연이 바텐더를 향해 손짓했다.


 “여기 잔 비면 계속 채워 줘.”


 “알겠습니다.”


 이번엔 스칼렛이 먼저 잔을 비웠다.


 “이제 좀 재밌어지려고 하네. 그래. 오백 년 만에 약혼녀를 만난 소감은 어때? 아, 이것도 기억 못 하겠구나?”


 “약혼녀? 누굴 말하는 거지? 설마,”


 “마셔.”


 급하게 잔을 비운 연이 으르렁대며 대답을 재촉했다.


 “누구냐고!”


 “이만하면 눈치는 챘을 텐데? 네가 좋아 죽던 그 여자애 있잖아. 조그맣고 예쁘장한 애.”


 “송연아.”

 “송연아.”


 둘은 동시에 말했다.


 연이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연아에게 달려가야 할 것 같았다. 스칼렛의 눈이 기이하게 빛난 건 그때였다.


 “앉아, 자기야.”


 연의 몸이 마치 사슬에 묶인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누군가 몸을 엄청난 무게로 내리누르는 것 같아, 자리에 다시 앉고 말았다.


 “이게, 무슨……!”


 그녀의 새끼손가락이 살짝 빛났다. 꿀같이 향기로운 한 방울의 액체가 잔에 퐁,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자, 한 잔 더 마셔. 특별히 봐줄게. 마지막 잔이야. 이 걸 마시고도 가겠다면, 보내줄 테니까.”


 스칼렛이 잔을 내밀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은 잔을 받아 들었다.


 “착하지? 후훗.”


 연은 말 잘 듣는 인형처럼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꿀꺽, 꿀꺽-


 술이 넘어갈 때마다 움직이는 목울대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웃은 스칼렛은,


 “자, 룸으로 가자.”


 그의 귀에 다시금 속삭였다. 인간인 그는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언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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