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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홍차 Oct 26. 2024

나를 잊은 신이 재벌이 되었다. 13

13.

 

 연은 안지훈이 예약한 룸 대신, 자신이 머물고 있는 로열 스위트룸으로 연아를 이끌었다.


 물론 방으로 데려가서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자신도 술에 취한 여자를 탐할 만큼 주변에 여자가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뭐, 들러붙는 여자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은 게 몇백 년이 넘었지만. 


 그저 자신이 익숙한, 편한 공간으로 그녀를 데려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방문을 닫자마자 훅 끼치는 들꽃향에 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방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체취를 뒤덮어버리는 연아의 향기에 또다시 밀려오는 아득한 그리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그 와중에 술기운에 나긋해진 눈으로 방긋방긋 웃으며, 


 “나무아래야. 이제 또 어디 안 갈 거지?”


 하며 옷자락을 붙잡는 연아를 보니 이성을 놓기 딱 좋았다.


 “이러면 곤란한데, 송연아.”


 그렇다고 뿌리칠 수도 없으니. 고운 이마에 뜨거운 입술을 한 번 살포시 누르고,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나무아래야. 어디 가지 마.”


 그를 자꾸 나무아래라고 부르는 것이 거슬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거슬렸다. 그렇다고 지금 자신이 나무아래가 아니라고 얘기했다간 이번에야말로 그녀에게 뺨을 맞을지도 모르겠다.


 “응. 멀리 안 갈게. 나의 아가씨.”


 그러니까 그대도 이대로, 내 옆에 계속 있어주면 안 될까. 술에서 깬 후에도. 이 잠에서, 깬 후에도 말이야.


 그녀가 꼭 쥔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고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준 연은 거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


 오늘의 사건은 워낙에 갑작스레 일어난 것이라 대처가 미흡했다. 무엇보다 호운그룹의 황태자라는 안지훈을 힘으로 끌어냈다는 게 마음에 아주 조금 걸렸다. 저번에 파티장에서의 키스사건 때문에 호운에 보상얘기도 있었고 하니, 이번 것도 얹어서 뭔가 내어 주기는 해야겠는데. 쯧, 골치 아프게 고민할 필요가 있나. 기업이 좋아하는 건 결국 돈 아니던가. 


 하남의 그 부지를 더 비싸게 사준다고 하면 어떨까.


 내 침대에서 곤히 잠든 저 아가씨가 머물고 있는 별장도 거기에 있다고 했었지.


 원래는 그 부지에 있는 산을 밀어버리고 골프장을 만들려고 했었다. 그러나 거기에 그녀가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냥 그대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물론, 그 땅의 명의를 내 것으로 바꾼다는 전제하에.


 그러니 호운이 원하는 값의 세배까지도 치를 셈이었다. 지금은 팔지 않겠다고 하는 것 같지만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버틸지 모르겠다.


 ‘하남 부지 가격, 세배까지 던져 봐.’


 비서에게 톡을 보내놓은 뒤, 폰을 내려놓고 소파에 기댔다. 귀가 밝은 그는 방 안에서 도롱도롱 자고 있는 송연아에게 괜히 심술이 났다. 내가 오늘 저녁을 무슨 심정으로 보냈는데 그렇게 편히 자는 거야.  


 ‘둘이 와인바에 갔습니다.’

 ‘안지훈이, 저희 호텔의 룸을 예약했습니다.’


 몰려오는 보고들이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내 피를 들끓게 했는지, 송연아. 넌 모르지.


 “그대는 정말 안지훈이 좋아?”


 나더러 나무아래라고 했잖아. 그가 그대의 약혼자라며. 그렇게 애틋하게 키스해 놓고선. 조용히 중얼거리자, 머리가 지끈거리며 또 기억에 없는 기억이 몰려와 눈앞에 펼쳐졌다.


 ‘저 꽃, 소중해?’


 작은 오두막 한켠에 곱게 말라 있던 들꽃더미가, 꼭 지금처럼 내 체향이 아닌 안지훈의 냄새를 연아에게 묻힌 것만 같아 기분이 나빴는데……?!


 “크윽……!”


 연이 새어 나온 기억 때문에 괴로워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싸매고 혼자 끙끙대고 있으려니, 어느새 창문으로 새벽빛이 은은하게 들어왔다.


 그의 눈앞을 어지럽히는 아련한 빛처럼, 손을 내밀면 잡힐 것 같은 그 자리에, 그녀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송연아는 귀를 쫑긋 세우고 이리저리 둘러보는 경계심 많은 산토끼마냥 그를 살펴본다.


 “괜찮아, ……요?”


 “……. 응.”


 “당신, 나무아래, 아니지요?”


 “응. 아니야.”


 연아의 다리 힘이 풀렸다. 차가운 바닥은 차가운 현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당신은 자꾸 나의 절망을 확인하게 하네요.’


 “이만 갈게요. 제가 실례를 했어요.”


 술을 괜히 마셔서는. 앞뒤 구분 못하고 그를 따라와 버렸다. 


 “가지 마.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내 곁에 있어줄 거지?”


 일어나려는 연아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연이 물었다. 짓 씹히는 발음이, 그의 간절함을 나타내는 듯했다.


 연아가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당신이 나무아래면 돼.”


 곧, 그녀를 내리누르던 무게가 서서히 가벼워졌다. 그는 그녀의 나무아래가 아니었으므로 그녀를 더 이상 붙잡아 둘 수가 없었다. 몇백 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그는 한 번도 나무아래였던 적이 없었으니까. 고작 스무 살의 송연아가 아는 그 이전의 시간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


 연아는 가만히 일어나, 소파에 앉은 그를 내려다보다가 떠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왜 꼭 ‘나무아래’ 여야만 하는 건데. ‘나’는 왜 안 되고?”


 연이 억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연아가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놀랐다. 애타게 올려다보는 표정마저 이렇게나, 같을 수가 있나. 그러니,


 “나무아래와 똑같은 얼굴로, 그와 똑같은 목소리로 나무아래가 아니라고 하는 당신을 어떻게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차갑게 말하는 그녀의 손목을 연이 붙잡았다. 이제는 거의 돌아봐달라고 애원하는 표정이었으나 그녀는 모른척했다.


 “그래서 안지훈을 만나는 건가? 차라리 나무아래가 아니라서?” 


 “지훈이 오빠는, 은인일 뿐이에요.”


 “아, 은인, 이라고.”


 연의 머릿속에 그들이 웃고 있는 사진 속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나도 그대에게 은인이 되고 싶군. 스스로도 어이없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낮게 터지는 실소에, 연아가 몸을 움찔했다. 웃음소리마저 같은데. 왜 나무아래가 아닌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분이 이상해. 나의 나무아래로 가고 싶어. 당장.


 뒷걸음치려는 그녀를 보며, 연이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였다. 


 “데려다줄게.”


 “혼자 갈 수 있어요.”


 “하남으로 갈 거 아닌가? 여기서는 차 없으면 금방 가기 힘드니까, 데려다줄게. 내가 운전하는 게 불편하면 운전기사를 붙여주지. 아, 안지훈을 불러주는 게 더 낫겠어?”


 연아는 인상을 팍 쓰며 라 칼마의 회장을 째려보고는, 아직 붙잡혀 있는 손목을 탁! 털고 도도하게 말했다.


 “운전 잘하시는 운전기사님으로 불러주세요.”


 그 와중에도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연은 피식 웃었다.



***



 구름 아래 인간계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픽 웃었다.


 “만났구나.”


 그녀를 위해 과일을 따던 손이 움찔, 멈추었다가 다시 태연하게 움직였다.


 “깊은숲속. 넌 알고 있었니? 저 아이가, 여태 살아있는 걸?”


 “죽은 걸 확인하지 못했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다 했어요. 누님.”


 그녀의 손가락이 나긋하게 자신의 턱을 짚었다.


 “인간이 어떻게 오백 년 넘게 살아있는 거지? 게다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말이야. 참 신기하네. 나무아래가 무언가 손을 쓴 걸까? 나랑 싸우기 전에는 이렇게 될 줄 몰랐을 텐데.”


 “그러게요. 신기하네요.”


 깊은숲속이 과일을 가지고 와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드세요.”


 “으응. 꽤 재밌었어. 나무아래가 자기가 나무아래가 아니라고 말하는 장면이 특히.”


 그녀가 과일 한 개를 받아 들며 말했다.


 “이렇게 되면 내가 꼭 나쁜 짓을 한 것 같잖아.”


 “아닌가요?”


 깊은숲속이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웃음을 머금고 있던 눈에 아주 잠시 날카로운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깊은숲속은 오래전부터 여전히, 변함없이, 구름너머를 사랑해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녀의 짓궂은 태도마저 사랑했으니. 그러니까 그는 지금 말해야만 했다. 한때 불같았던 나무아래를 향한 사랑을, 이제는 끝맺을 수 있도록.


 “나무아래의 기억을 풀어주는 건 어때요, 누님? 오백년이나 흘렀는데요.”


 ‘그리고 그 아이 말고 이제 날 봐주는 건 어떨까요.’


 이렇게 속마음을 숨긴 채, 말한다.


 “지금? 한창 재밌는데, 왜?”


 “나무아래는, ……지금이 아니면, 기억이 돌아와 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까요.”


 “흥. 그럴까나.”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구름너머는 이윽고 입꼬리를 올려 방긋 웃었다.


 “역시, 다녀와야겠어.”


 “누님?”


 “나를 보고도 아직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래 좋아. 네 말대로 할게. 봉인 풀지 뭐.”


 깊은숲속은 한숨을 삼켰다. 그냥 둘 걸,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



 “절대 팔면 안 돼요.”


 “왜. 별볼일 없는 땅을 3배나 쳐준다지 않느냐.”


 “호운그룹이 돈이 없어요? 라 칼마 회장이 우릴 아주 우습게 보는 거라고요. 저번엔 연아씨에게 강제로 키스하더니 이번엔 저를 차에 밀어 넣어 보냈다고요!”


 다음날, 지훈은 아버지 앞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파워에서 좀 밀리지.”


 “아버지!”


 “크하하! 알았다, 알았어. 안 판다고 하면 되지 않냐. 뭐가 그렇게 안달이 난 게야.”


 “정말이죠?”


 “그래. 이 녀석아. 너는 연아나 잘 꼬시고 있지 얘기 듣자마자 여기로 쪼르르 달려와서는 이게 뭐냐. 재경이가 그러더라. 네가 연아 꼬시는데 실패하면 연아를 딸로 삼으라고. 우리 함여사도 그렇게나 그 애가 마음에 든다고 하고 말이다. 며느리 or 딸이라 이거야. 알겠냐.”


 “아악! 아버지!”


 “소리 지르지 말고 나가라. 귀 아프다.”


 “예. 제가 반드시 연아씨를 며느리감으로 데려오겠습니다.”


 “그래. 이래야 내 아들이지.”


달칵-


 아들인 안지훈이 회장실을 나가고 난 후, 그의 아버지이자 호운그룹의 회장인 안석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있어도 부족한 것이 기업의 돈이었다. 세배로 쳐준다는 걸 내치자니 좀 아까웠다. 그래도 아들이고, 딸이고, 우리의 은인인 연아라는 아이가 그 별장이 있는 산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절대로 팔지 말라고 하니. 아버지로서 어쩌겠나. 말 들어야지.


삐-


 “라 칼마에게 그 땅 안 판다고 전해.”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비서에게 말을 한 뒤, 잠시 서류 작업을 하고 있으려니, 


삐-


 ‘회장님. 라 칼마에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뭐라던가.”


 ‘그 땅, 시세의 열 배로, 쳐주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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