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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홍차 Oct 01. 2024

나를 잊은 신이 재벌이 되었다. 11

11.

 ‘예뻐서 반한 거, 맞지.’

 얼굴과 온몸에 재를 묻힌, 차림새도 이상하던 소녀일 땐 몰랐다. 그 재를 씻어내니 뽀얀 피부와 따뜻한 다갈색 눈동자에서 빛을 내는 아가씨가 튀어나올 줄은.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들어앉은 앙증맞은 코와 체리같이 붉은 입술은 또 어떻고.

 그래. 그 예쁜 얼굴 보고 반해버린 거, 맞다. 안지훈은 솔직히 인정하기로 했다. 물론 처음엔 사기꾼이거나, 정신이 이상한 여자로 의심했었지만. 지금은,

 “나는 송연아를 좋아하고 있다.”

 한 번 내보인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온다.

 채 피워내기도 전에 연아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말에 묻어뒀던 마음을, 그녀 앞에서 남자친구니 어쩌니 하며 내뱉어버린 이상, 더 숨길 생각도 없었다.

 ‘그나저나 연아씨는 내가 남자친구라고 선언을 하든말든 별로 신경이 안 쓰이나. 내가 그렇게 별로인가.’

 지훈은 샤워를 하고 난 후 거울을 보았다.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 앞에서 턱을 잡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기도 했다. 인상이 좀 날카로운가. 그래서 일부러 안경도 쓰는데.

 ‘몸도 나쁘지 않잖아.’

 바쁜 와중에 헬스장 출근도장 찍은 보람이 있었다. 잔근육이 보기 좋게 붙어있는 팔을 올려 이런저런 포즈도 취해보았다.

 ‘이 정도면 나도 어디서 꿀리진 않을 거 같은데.’

 아닌가. 어이없어하는 재경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시크한 내 동생은 나더러 어디 내놔도 꿀린다며 웃겠지.

 “하……. 연아씨가 좀 예뻐야지.”

 지훈의 자신감을 끌어올리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은 또 있었다. 연아가 나무아래라고 지목했던 그 남자, 그녀가 직접 그녀의 약혼자라고 주장했던 그 남자. 바로 라 칼마의 회장이었다.

 여태까지 베일에 싸여있던 라 칼마의 회장은 그냥 쭈욱 베일에 싸인 채로 살지, 뭐 하러 갑자기 튀어나온 건지. 하필이면 왜 또 그렇게 잘생긴 건지.

 연아와 그 남자, 둘이 나란히 있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한 폭의 그림 같았으니, 둘 사이에 자신의 낄 자리가 없어 보여 크게 상심한 지훈은 애꿎은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래. 머리, 머리부터 하자.’

 오랜만에 염색을 해볼까. ……이왕이면 연아의 눈동자색과 같은 다갈색으로. 너무 사심이 들어갔나 싶기도 한데. 그래도, 좋아해 주면 좋겠다. 침대에 누운 채 뒤척이던 지훈은 처음으로 여자 때문에 이렇게 설렜다. 스물여섯에 찾아온 첫사랑이었다.

 ‘톡을 보내볼까? 지금 공부하려나? 참아야겠지?’

 제발, 지금 보내지 못했던 내 마음이 언젠가 그녀에게 닿기를.


***


 공부 중이던 연아가 연필을 툭, 내려놓았다.

 “하아…….”

 잭이 로즈에게 꽃을 한 아름 안겨 주는 그림 위로, 양팔 가득 꽃을 꺾어다 주던 나무아래가 덧그려졌다.

 “Why did he ignore me? 고작 책 속의 잭이랑 로즈마저 연애를 하는데.”

 나무아래 넌, 왜……?

 연아는 파티에서의 입맞춤을 떠올렸다. 아득히 멀어지던 샹들리에, 아찔하게 쏟아지던 풀내음과 여름의 그 향기. 그가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나무아래가 아니라니, 말도 안 돼. 그러나 그는 분명하게,

 ‘난 나무아래가 아니야.’

 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연아를, 연아와의 기억을, 연아와의 미래를 부정했다. 여간해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배신감에 연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니라면서. 나무아래가 아니라면서 키스는 왜 해!

 손가락에 낀 옥반지를 빼서 집어던져 버리려다 차마 그러지 못하고, 소중히 손에 쥔 채 마치 그것이 나무아래인양 노려보다가, 혹여나 잃어버릴까 저어 되어, 서둘러 다시 꼈다.

 꽁냥대는 잭과 로즈 때문에 영어공부는 물 건너갔다. 나중에 다시 해야지 뭐. 연아는 한숨을 쉬며 영어책을 치우고 국어책을 폈다. 지난번에 공부한 부분을 대충 훑어 복습한 후, 책장을 넘기니 ‘산은 옛산이로되’라는 시조를 짚어 볼 차례였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 아니로다.
 밤낮으로 흐르니 옛물이 있을쏘냐.
 사람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는구나.”

 산은 변하지 않는데 물은 흘러가버려 그전과 같지 않으니, 사람도 물과 같아서 가고 오지 않는다……. 그래, 그렇지. 나무아래도 오지 않았지…….

 “이……! 이익! 국어! 너마저!!!”

 연아가 다시 반지를 빼, 말아, 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연아양. 지훈 도련님이 오셨어요.”

 연아가 ‘어?’하며 일어나려던 때에 지훈이 문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연아씨.”

 “어? 오빠 머리색깔이 바뀌었네요?”

 김여사는 두 선남선녀를 바라보다 흐뭇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 아래층으로 갔다.

 “네. 염색했는데, 어때요?”

 “색이 예뻐요.”

 “내가 멋있는 게 아니라요?”

 연아가 당황하며 말을 고쳤다.

 “아, 오빠가 멋있지요.”

 “하하. 엎드려 절 받기여도 연아씨가 그렇게 말해주니 기분은 좋네요.”

 지훈이 웃자 연아도 따라서 배시시 웃었다.

 “공부하기 힘들지 않아요?”

 연아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공부는 재밌어요. 근데 자꾸 잡생각이 드는 게 문제네요.”

 옥반지를 매만지며 하는 말에, 눈치도 없이 자꾸 그녀의 머릿속에 끼어드는 잡생각이 뭔지 알아챈 지훈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여전히 그 남자구나. 그래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우리, 나갈래요? 아니, 나가요. 바람 쐬러 가요.”

 지훈은 요즘 한창 사업 물려받을 준비 하느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놀아도 괜찮은가. 연아가 망설이자, 지훈이 손을 내밀었다.

 “하루쯤은 쉬어도 돼요.”

 ‘나도 그렇고, 연아씨도.’ 지훈이 덧붙였다. 연아가 잠시 고민하다, 지훈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 잠깐의 순간, 지훈은 한순간이나마 라 칼마의 회장을 상대로 승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제 시작이야.’

 그 남자에게서 조금씩 고개를 돌려, 언젠가 기필코 연아씨가 나를 보게 만들겠어.

 “그래서, 우리 어디 가요?”

 옆자리에 앉은 연아가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지훈이 연아 벨트 매는 것을 도와주려다 타이밍을 놓치고는 씁쓸하게 조금 웃었다. 언제 이런 걸 해봤어야 말이지.

 “뭐라도 먹고 움직일 거예요. 연아씨, 나랑 놀다가 쓰러질 것 같아요.”

 “재경언니도 그렇고, 오빠까지. 왜 그렇게 밥을 못 먹여서 안달이람. 난 쌩쌩해요.”

 “연아씨는 좀 더 먹어야 해요.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저는 간단하게 김밥 같은 것도 괜찮아요.”

 “음, 그럼 우리 김밥 사가지고 공원가요. 연아씨한테 주고 싶은 것도, 연아씨와 같이 하고 싶은 것도 있어요.”

 연아가 그게 뭘까,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알았다며 끄덕였다. 지훈의 차는 어느새 김밥집 앞에 정차했고, 지훈이 김밥을 사 오겠다며 달려갔다.

 ‘오빠는 나에게 해가 될 일을 하지도, 시키지도 않을 테니까.’

 호운가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재경의 건강을 찾아준 연아를 은인이라 하지만, 연아는 오히려 그 사람들을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없던 신분을 새로 만들어주고, 갈 곳 없는 자신에게 호화로운 별장을 그냥 내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연아가 새로운 미래를 꾸려나가는데 도움을 주고 있으니.

 그래서 연아는 무조건적으로 그들을 믿었다. 지훈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믿었다.

 그래서 저번에 파티장에서 남자친구 어쩌고 했던 것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남자친구라는 것이 서로 이성 간의 감정을 갖고 사귀는 사이를 말하는 것임을 안다. 그래도 그럴만하니까 그렇게 말한 것일 테지. 덕분에 그 남자에게 덜 휘둘리고 그 자리를 피할 수 있기도 했다. 아, 그래서였을까. 오빠가 남자친구라고 나서준 덕분에, 자기가 나무아래가 아니라고 우기는 라 칼마의 회장 앞에서 초라해지지도 않았다.

 역시, 그때는 아주 조금, 지훈오빠가 내게 관심이 있나 의심을 했지만 아니었어. 그냥 내가 그 남자한테 당하고만 있는 게 싫었던 거야. 오빠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괜히 어색해질 뻔했잖아. 헛다리 짚지 않아서 다행이다, 송연아.”

 픽, 웃음이 났다.


달칵-

 “뭘 혼자 그렇게 예쁘게 웃고 있어요.”

 “예?”

 “아니에요.”

 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둘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공원으로 향했고, 연아는 지훈이 어렸을 때 스케이트를 즐겨 탔던 것을 알게 되었다.

 “스케이트, 재미있나요? 전 타보지 않아서요.”

 “그래요? 그럼 이제 배우면 되겠네요.”

 짜잔! 하며 트렁크에서 네모난 스포츠가방을 두 개 꺼낸 지훈이 칭찬받고 싶어 하는 소년처럼 잔뜩 신이 나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연아가 까르르 웃었다. 말 안 해도 저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스케이트예요?”

 “네. 롤러스케이트요.”

 “와아! 정말 기대돼요!”

 연아가 밝게 눈을 빛내는 것이 얼마만인지. 지훈은 그 모습에 눈이 부셔 심장까지 떨려왔다.

 “타보고 재미있으면 아예 연아씨 발에 딱 맞는 걸로 맞춤제작 해줄게요.”

 “아이참,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요. 동생 살려준 은인한테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연아가 민망한 듯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귀엽다.’

 지훈은 하마터면 터져 나올뻔한 속엣말을 삼키고 연아가 스케이트를 신는 것을 도와주었다. 어떡하지. 발도 조그맣고 귀여워서. 변태같이 귀가 달아올랐다. 귀는 마음처럼 숨길 수도 없는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끈을 꼭 묶어주고, 벤치에 앉아 있던 연아를 일으켜 주었는데.

 “앗!”

 미끌거리는 생경한 바닥에 연아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지훈의 팔에 안겼다.


***


 “두 사람,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 정말로 연인 같았습니다.”

 “……나가 봐.”

 “보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연이 대답대신 고개를 꺾으니 두둑, 하고 험상궂은소리가 났다. 마치 그의 기분을 말해주듯이.

 “그, 전부터 매입하려고 작업하던 하남의 부지, 그곳이,”

 “알고 있어. 호운그룹 거잖아.”

 “네. 그곳 별장에 그 아가씨가 머물고 계십니다.”

 “머물러?”

 “네. 아예 거기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연은 자신이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도 모르는 채,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려 눈을 감고 볼안쪽을 깨물었다. 으득. 피부가 찢어지고 터져 나온 피맛이 아릿했다.

 “알겠으니까. 나가.”

 “예. 보스.”

 송연아. 그 여자. 정말 안지훈의 여자라고?

 스무 살. 얼마 전 초졸 검정고시를 치렀고. 호운그룹이 뒤를 봐주고 있는 것까진 알겠는데.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차마 구겨버리지 못하고 책상 위에 던졌다. 송연아와 안지훈이 공원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사진들을.

 다 좋아. 저번처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보다는 이게 낫지. 그런데.

 왜 내가 아닌 그따위 자식 앞에서 그렇게 곱게 웃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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