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재벌가의 사교계는 라 칼마가 주최하는 파티 소식으로 들썩였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업이 한국으로 본사를 옮기고 들어앉은 것도 신기한데 이번에 파티까지 연다고 하니 말이다. 음식 준비를 위해 유명 셰프들이 초대되고,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의상실도 맞춤 드레스 제작으로 밤낮 없었다.
오늘은 모처럼 청담동에서 유명한 드레스샵인 ‘마리블랑쉐’에서 원장이 직접 나와 접객을 하고 있었다. 호운그룹이 귀한 딸들을 보낸다고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호운그룹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았다.
재경이 연아의 어깨에 원단을 이것저것 대보았다. 재벌들만 참석한다는 파티에 자신이 꼭 가야 하냐고 묻는 연아에게, 꼭 가야 한다는 고집을 부려 드레스샵까지 끌고 온 재경이었다.
“얘는 여름쿨톤이라 파스텔톤이 잘 어울려요, 원장님.”
“아이, 재경씨. 나도 척 보면 알지. 그런데 분홍색은 너무 어려 보이고, 하늘색은 추워 보이니까 연보라색에 화려하게 비즈 박힌 게 제일 낫겠는데, 반짝반짝 하니 조명받으면 얼굴도 더 환해 보이고. 어때요? 연아씨 생각은?”
연아가 수줍게 답했다.
“저는 드레스는 잘 모르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 보라색이라, 연보라색도 마음에 들어요.”
“어머! 잘됐다. 그럼, 보자……. 이거 어때? 어머, 이게 더 잘 받는다. 이 원단으로 해요.”
재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비즈, 싼 티 나는 건 절대 안 돼요. 아시죠? 내 거보다 더 신경 써줘요. 얘가 이번에 정말 데뷔탕트란 말야.”
마리블랑쉐의 원장이 결의를 다지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나저나 드레스코드가 ‘영화제 시상식’이라니 너무 낭만적이지 않아요?”
“세계적인 기업에서 기껏 생각한 게 그거라니 약간 구리긴 한데 뭐, 난 연아만 재밌으면 됐어요.”
요즘 재경의 생각은 오로지 연아의 기분에 맞춰져 있었다.
“재경씨는 여전히 시크하네. 이번에도 올블랙?”
“네.”
“그럼 머메이드 스타일로 가면서 밑단 부분을 쉬폰으로 샤라락! 할게요. 아직 나이도 어린데 너무 시크하면 안 돼. 연아씨랑도 너무 차이나 보일 거예요.”
“하늘거리는 건 별로긴 한데. 어쩔 수 없죠. 원장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디자인 시안은 이렇게, 괜찮죠?”
“네. 연아는 몸매가 드러나도 너무 깡말라 보이지 않게. 애가 너무 말랐어요.”
원장이 연아를 위에서 아래로 쭉 훑어보다가, 손가락에 끼워진 옥반지를 흘끗 보았다.
“그러게요. 너무 말랐다. 그런데 연아씨. 이 반지는 데일리템이에요? 예쁘긴 한데, 뭐랄까. 음……, 어린 아가씨가 하기에는 독특한데요.”
“아, 그런가요. 그래도 이건 빼지 않을 거예요.”
“어머.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나 보다.”
연아는 그저 콧등을 찡긋하며 웃었다. 이 세계에서 스무 살에 혼약자가 있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비춰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눈치 빠른 원장이 말을 돌렸다.
“참, 지훈씨는 이번에 슈트 새로 안 맞추셔도 된다고 하던데. 같이 참석은 하시는 거죠?”
“모르겠네요. 오빠는. 파티 전날이나 되어봐야 알 것 같아요.”
재경이 답했다.
“일이 많이 바쁘신가 보다. 역시 호운가의 황태자답네요.”
“우엑. 황태자는, 무슨.”
“호호호! 어떻게, 재경씨랑 커플로 아이템 하나 맞춰드릴까요?”
“아뇨! 절대! 네버! 해주실 거면 차라리 오빠랑 연아랑 맞춰주세요.”
가만히 듣고 있던 연아가 ‘응?’하고 고개를 갸웃하자, 재경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별거 아냐. 그냥 패션, 패션!”
연아는 뭔지 모른 채로 수긍했다.
‘그래, 그냥 패션얘기인가 보다.’
그게 어떤 파장을 불러올 줄도 모르고.
***
9월 마지막주 금요일밤이 되었다.
재벌가뿐만 아니라 정계까지도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라 칼마의 파티는, 바로 오늘밤, 라 칼마호텔의 제1연회홀에서 열렸다.
그룹 라 칼마를 총괄하는 보스의 직속 비서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급히 탑승했다. 그는 연회홀에 손님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한다는 소식을 전할 겸 보스의 의상을 챙기기 위해, 연이 요즘 머물고 있는 최상층 로열 스위트룸에 들어섰다.
연은 비서의 보고를 들으며 잘 짜여진 근육질 상체에 셔츠를 걸쳤다.
“타이는 보라색이 좋겠어.”
“보라색은 나이 들어 보이는, ……네. 알겠습니다. 보스는 무슨색이든 잘 받으시니까요.”
비서가 드레스룸 테이블서랍에서 보라색 넥타이를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 색깔이 대수냐. 잘생긴 게 최고지. 인종을 뛰어넘어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그의 보스는, 다 좋은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을 때가 종종 있었다. 타이를 매며 창밖을 보고 있는 지금은 어디 먼 곳에 홀로 서있는 듯했다. 마치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 잘생기셔서 그런가.’
검은 재킷을 어깨에 둘러주고는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는 비서의 눈이 경외와 찬탄으로 가득 찼다. 보스는 마치 현세에 강림한 남신 같았다. 이미 평범한 인간의 범주는 벗어났다. 외모뿐만 아니라 사업가로서의 능력도 뛰어났으니, 이 정도면 남자가 봐도 반하겠다.
‘기자들의 출입은 막았지만 소문은 막지 못할 테니 오늘밤 이후로 세상이 한바탕 난리가 나겠구나.’
비서가 뒤에서 눈을 빛내든지 말든지, 연은 왼손 약지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문득, 꼭 보라색 타이를 매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었는데.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흐릿해져 버렸다. 주먹을 쥐어보아도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잔상이 아쉬웠다.
“쯧.”
연이 혀를 찼다.
“내려가지.”
“예. 보스.”
비서가 앞장서서 연회홀로 입장했고, 마이크가 놓인 단상으로 연을 안내했다. 대외적으로는 라 칼마의 보스가 대인기피증이라고 소문을 냈지만 단지 연이 늙지도, 죽지도 않는 것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대인기피증 따위 없는 연은 거칠 것 없이 단상 위로 올라가 마이크 앞에 섰다.
역시나, 그의 뛰어난 외모에 사람들이 넋을 놓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렇게나 젊고 잘생긴 남자가 라 칼마의 회장이라고?
“바쁘신 와중에도 제 초대에 응해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홀에 울렸을 때, 마침 지훈, 재경과 함께 연회장으로 막 들어서던 연아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나무, ……아래의 목소리…….”
“오늘 이 자리는, 라 칼마가 미국의 로크 레이션을 인수한 것을 기념하는 자리입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연아야, 왜 그래?”
순식간에 그 자리에 굳어버린 연아를 보며 재경이 물었다. 지훈도 걱정스럽게 연아의 팔을 붙잡았다.
“연아씨, 괜찮아요?”
그, 아주 작은 소요가, 연의 시선을 붙잡았고,
“이로써 우리는, 세계에…….”
그와, 그녀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순간, 그는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로 끌리는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려 무던히도 노력해야만 했다. 다리가 멋대로 저 ‘처음 보는’ 여자한테 가겠다고 움직이려 했다. 그렇다. 분명히 처음 본 여자였다. 그러나 이 이끌림은 뭐란 말인가.
그때 여자의 빨간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였다.
‘나무아래예요.’
멀어서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그랬다. 나무아래가 뭔지는 모르지만 가야 했다. 그녀에게, 지금, 당장.
그러나,
“보스.”
비서의 속삭임이 그를 다시 단상 위로 끄집어 올렸다. 정신을 차린 연이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세계에 영향력을 더 넓히게 되었고, 라 칼마는 그 이윤을 이곳, 대한민국과 함께 누릴 것입니다.”
연이 준비된 샴페인잔을 들어 올렸고, 모두들 들고 있던 잔을 들어 건배했다. 비서가 밤새 준비했던 건배사는 이렇게 짧게 축약되었다.
연은 입술만 축인 뒤 서둘러 내려와 연회장의 입구로 향했으나 이미 그 여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갔을까. 아니면, 인파 속에 숨었나.’
두리번거리는 연의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
라 칼마호텔 연회장에서 야외 정원으로 통하는 문 옆, 환히 켜진 조명 옆에 세 사람이 있었다. 재경과 지훈은, 갑자기 큰 충격에 빠져 뛰쳐나온 연아를 따라 나온 참이었다.
“진정해, 연아야.”
“……눈을 피했어요. 나무아래가 저를 못 본 체했다고요!”
“연아씨, 진짜로 못 본 걸 수도 있어요. 다시 가봐요.”
지훈의 말에 연아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었다.
“하지만, 또 모른 체하면, 그때는 저 정말 어떡해요.”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다. 재경이 놀라 소리쳤다.
“안돼! 울면 화장 망가져!”
“야, 지금 그게 중요하냐!”
지훈이 그런 재경을 타박했다. 재경이 무슨 당연한 소리를 어이없게 하냐는 듯이 되물었다.
“그럼 안 중요해? 내가 연아 화장 막 번진 채로 나무아래씨 만나게 둘 것 같아?”
지훈도 그렇고, 연아도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엉망인 꼴을 보여줄 수는 없지. 연아가 하늘을 보며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눈물이 흐르지 못하게 말려버리려는 것이었다. 재경이 옆에서 연아의 눈가에 손부채질을 해주었다.
“그나저나 라 칼마의 회장이라니. 나무아래씨 정체가 어마어마한데. 알고 있었어?”
“……아뇨, 전혀요.”
어느 정도 눈물이 마른 후, 연아가 재경을 보며 말했다.
“언니, 아무래도 다시 들어가 봐야겠어요. 나무아래가 맞는지 확인해야 해요.”
“그래. 가보자고. 나무아래씨가 맞다면 내가 혼을 내주겠어! 여름에 왜 안 왔는지, 우리 연아 왜 기다리게 했는지 따져야지.”
지훈이 한숨을 쉬며 뒤따랐다.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다.
연회홀에는 조용한 웅성거림이 일렁이고 있었다. 다들 라 칼마의 회장에게 다가가려고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다.
연아는 그런 거 없었다.
재경과 지훈을 내버려 두고 잰걸음으로 또각또각 걸어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녀는 드디어, 그의 앞에 섰다.
“나무아래, 맞지?”
짧아진 머리, 처음 보는 차림새로 치장한 그였음에도, 연아가 그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역시나 그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성큼, 연아에게 다가와 그녀의 양 볼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리고는 그대로 입을 맞췄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갈급하게.
홀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숨을 들이켰고, 몇몇은 작은 비명을 삼켰다.
연아는 눈을 감았다. ……그였다. 풀내음 가득한 여름의 이 입맞춤은, 그가 아닐 리가 없었다.
촉-
입술과 입술이 떨어지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난 나무아래가 아니야. 아가씨.”
그의 입에서 벼락이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