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 합격발표가 나던 날, 연아는 밝게 웃지 못했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는데 아직 나무아래가 오지 않은 탓이다. ‘어쩌면’, 하고 어렴풋이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여긴 연아와 나무아래가 원래 살던 세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날 찾아와 주길 바랐는데.’
“연아야, 괜찮아?”
재경은 우울해하는 연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재경도 연아가 그 남자를 여름 내내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알았다. 봄엔 그래도 소녀마냥 헤실헤실 잘 웃었는데, 여름이 하루하루 지날수록 웃음기가 사라졌다.
“저, ……괜찮지, 않은 것 같아요.”
연아가 솔직하게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쩍 마른 손목이 곧 부러질 것같이 위태로워 조심스레 손을 잡은 재경이 연아를 잡아끌었다.
“나가자. 너 한 달 넘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 사람 기다렸잖아. 모처럼 합격했는데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기분전환 할 겸 샵에서 메이크업도 받고, 어?”
“안 그래도 돼요, 언니. 합격은 무슨. 기껏해야 초등학교 졸업한 건데요.”
“가자. 내가 나가고 싶어서 그래. 아! 나 9월 되면 복학하고 너랑 놀 시간 없을 거란 말이야. 가자아. 응? 응? 응?”
연아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며 애교를 떠는 재경 때문에 웃음이 터진 연아는 하는 수 없이 한숨을 감추며 외출할 준비를 했다.
재경은 그런 연아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호운그룹 회장의 딸 지위를 팍팍 이용했다. 먼저 연아를 살찌워야겠다며 예약제로 운영하는 고급 레스토랑에 전화를 걸어, 아직 오픈 전이라서 곤히 자고 있던 셰프를 깨워 재료준비부터 하고 있으라고 큰소리를 쳤다.
“신겸오빠! 나 지금 바로 하남 별장에서 출발해. 내 동생 데려갈 거니까 소화 잘되고 맛있는 걸로 빨리! 알았지? 응? 나 동생 있어! 얼마 전에 예쁜 애로 하나 생겼어! 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재료준비부터 해 놔.”
다음은 메이크업샵이었다.
“원장님! 지난번에 오늘쯤 동생이랑 갈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나 밥만 먹고 금방 갈게. 얘 피부톤? 쿨톤 같은데 원장님이 봐줘야 정확하게 알지. 응! 알았어요, 쫌 이따 봐요!”
재경이 이제 연아의 옷을 고르러 달려들었다. 다 지난봄에 새로 산 옷인데도 재경의 눈에 차는 게 없었다. 비싼 옷은 연아가 극구 사양했기 때문이었다.
“연아야. 안 되겠어. 오늘 백화점도 가자. 옷을 더 사야겠어. 이제 가을이잖아.”
“봄에 샀던 옷을 입으면 되는데…….”
“아니야. 내가 집에만 있을 때면 몰라도 이젠 절대 안 돼.”
재경이 자못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봤자 연아에겐 아직 연약한 환자였다. 전국의 약방에서 꾸준히 재료를 구해다가 잘 조합해 정성 들여 먹여놓으니 이런 기운도 나는게지. 연아가 뿌듯한 마음에 재경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너, 너 왜 갑자기 인자하게 웃는 건데!”
연아의 몸에 이 옷 저 옷을 대보던 재경이 흠칫 놀라며 떨어졌다. 연아가 그 모습에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자, 그제야 재경도 미소를 지었다.
“연아야. 그냥 나랑 같이 서울 가서 살자. 내가 잘할게. 내가 옛날의 안재경이 아니라니까?”
“알아요. 언니 처음 만났을 땐 무슨 상처 입은 고양이같이 날을 세우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지금은?”
“개냥이?”
“흐흐흐흐, 너도 많이 달라졌어. 그런 말도 다 쓰고.”
둘은 마치 친자매처럼 청바지에 블라우스를 맞춰 입고서 별장을 나섰다. 재경은 짙은 파란색 블라우스, 연아는 연보라색 블라우스.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둘의 수다는 끊이지 않았다. 덕분에 연아의 울적했던 기분도 많이 나아졌다.
연아는 내년 상반기에는 중학교 검정고시를, 하반기엔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목표로 공부하기로 했다. 재경은 서울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공부하라고 했지만, 연아는 계속 거절했다. 한동안은 지금처럼 별장에서 지내면서, 내년 여름 한 번만 더 나무아래를 기다리려는 심산이었다. 내년에는, 오지 않을까. 그전처럼. 그러나 확신은 없었다.
재경은 연아가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그 온다는 약속도 안 지키는 양아치 같은 남자보다는 차라리 순둥순둥한 자기 오빠가 낫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다 옆을 봤는데, 연아가 너무 예쁜 것이었다.
‘아니다. 역시 얘가 아까워. 아빠한테 졸라서 동생으로 입적하자고 하자.’
재경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연아는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 낯선 세상에서 자신은 이방인이었다. 자신은 운이 좋게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잘 풀렸지만 만약에 나무아래는 아니라면? 낯선 곳에서 못된 사람들을 만나 생고생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갑자기 창밖이 깜깜해졌다. 산을 좋아하는 나무아래는 이렇게 산을 깎아 터널을 뚫고 자동차가 지나다닌다는 걸 알면 얼마나 놀랄까.
***
“이 좁은 나라에서 골프장을 만들려면 산을 밀어야지. 남은 땅도 얼마 없잖아?”
“예. 보스, 그럼 그 하남의 그 부지, 매입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고 나가자, 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 또 갑자기 답답했다. 보통 토지 관련된 업무를 처리할 때 이렇게 답답했는데 오늘도 역시나였다. 이렇게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가슴이 답답할 때면, 왼손 약지의 흉터를 들여다보곤 했다. 답답함이 가신다기보다는 기억을 잃고도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열심히 살았다.
어느 땐, 외국인의 신분으로, 어느 땐 한국인이 되어 이 땅을 맴돌면서.
연은 지금 그룹 ‘라 칼마’의 오너로서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오래전부터 해왔던 일이라, 서류를 살피고 사인을 하는 모습이 익숙했다. 라 칼마는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하고, 기업을 합병시키고, 사들이고, 팔고, 경쟁기업은 없애버리면서 이익을 얻었고, 세계적인 그룹이 되었다.
요즘엔 미국의 군수기업 하나를 인수하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쯤 결판이 날 것 같은데.’
연이 생각하기 무섭게, 책상에 놓여있던 네 개의 핸드폰 중 하나가 울렸다.
“음. 박전무.”
‘보스! 됐습니다! 이제 ‘로크 레이션’은 우리 겁니다!’
“잘됐군.”
‘축하파티를 열어야겠습니다, 보스!’
“그리 하도록 해.”
‘보스도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아셨죠?’
연이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았다.
“……생각해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럼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연은 한껏 들떠있는 박윤찬 전무의 말에 대충 대답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미국에서 4위를 차지하고 있던 군수업체를 사들이는 큰 프로젝트였다. 박전무가 저렇게 들뜰만했다. 이제 미국과 전 세계에, 라 칼마의 영향력이 더 커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만족스러운가?’
연은 고개를 저었다.
기업이 계속 커지고, 돈은 벌어도 벌어도 부족했다. 그렇다고 연의 씀씀이가 큰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필요한 것만 아랫사람을 시켜 격식 맞춰 채워 넣을 뿐이었는데, 그래도 뭔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는 목적을 잃은 채 현금을 꾸역꾸역 모아놓고 있었다.
처음엔 뭔가 이유가 있어서 돈을 벌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를, 잊었다.
***
‘다음엔 꼭 돈 많이 벌어서 더 좋은 걸로 사줄게.’
왜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났을까. 나무아래와 헤어지던 날, 옥가락지를 가리키며 씩 웃던 그의 모습이. 연아가 눈을 내리깔고 약지에 낀 옥가락지를 매만졌다. 긴 속눈썹이 눈에 깊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연아의 옆에서는, 셰프라는 작자와 재경이 투닥거리는 중이었다. 인상 좋게 생긴 김신겸이라는 그 남자는 자꾸 연아에게 머리를 들이밀며 말을 걸었다.
“정말로 아름다우십니다. 연예인 안 하시고 뭐 하세요? 송연아씨라 했죠? 이름도 예쁘네. 아까 들어오시는데 후광이! 이야!”
재경이 그런 신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꾸욱 밀었다.
“아, 미쳤어? 내 동생한테 집적대지 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우리 밥이나 줘!”
“아이고오, 재벌이 사람잡는다아.”
“진짜 패버리기 전에.”
“예이, 예이.”
곧 테이블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예쁜 음식들이 하나씩 올라왔다.
“저 사람이, 하는 짓은 저래도 밥은 맛있게 잘해. 많이 먹어, 연아야.”
“네, 언니. 언니도 꼭꼭 씹어 드세요.”
“제가 연아씨거는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들었습니다.”
신겸이 너스레를 떨자 재경이 픽 웃었다.
“그건 잘했네.”
연아와 재경은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맛있게 식사를 끝냈다. 신겸의 연아를 향한 은근한 플러팅을 무시해 가면서. 마지막으로 나온 차를 마시며 재경이 연아에게 말했다.
“이제 샵에 갔다가 옷 사러 가자.”
“옷 정말 사야 하나? 배부른데……. 배 나왔을 건데…….”
“너 배 하나도 안 나왔거든! 2차로 밥 먹으러 가자고 하기 전에 가자?”
“알았어요, 알았어. 옷 사러 가요.”
연아가 주섬주섬 핸드폰을 챙기자, 신겸이 가까이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연아씨, 저, 그 핸드폰,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 이거요? 번호, 요?”
연아가 핸드폰 번호를 알려달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재경이 정말 이 말은 하기 싫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결혼하자던 약속도 잊은 건지, 제 때 나타나지도 않은 양아치 같은 약혼자도 약혼자라고. 있는 건 사실이니 말은 해야지.
“내가 앞으로 얼마나 이 말을 하고 다녀야 할지 눈에 선하다. 얘 약혼자 있어. 꿈 깨셔.”
“엇? 벌써 약혼을 했어요? 역시 연아씨도 재벌이라는 높은 벽에 갇혀서……!”
“뭐래. 웃는 상 꼴뚜기가.”
“헙. 연아씨. 얘 말하는 거 보세요. 나쁜 입 옮아요. 아무리 언니라 해도 같이 다니면 안 되겠어요. 차라리 제가 같이!”
“닥쳐, 꼴뚜기.”
어머나, 사람더러 꼴뚜기라니. 연아는 중간에서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적어도 우리 오빠정도는 되어야 들이대볼 만하지.”
재경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런데 옆을 보니 커다란 다갈색 눈, 긴 속눈썹, 아담한데 오똑하게 솟은 앙증맞은 코, 체리처럼 붉은 입술……, 연아가 또 너무 예쁘다. 화장도 안 했는데 너무 예쁘다.
‘지훈이오빠도 나름 잘생긴 편인데. 연아 옆에 있으면 오징어가 되겠구나.’
신겸이 저렇게 안달 날 만도 하다. 앞으로 연아를 지키려면 고생깨나 하겠네. 재경이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그때 신겸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서둘러 물었다.
“아, 재경아. 너 앞으로는 파티 참석할 거야?”
“파티? 무슨 파티? 나 한동안 파티 안 나간 거 알잖아.”
“이제 건강 많이 좋아졌다며. 호운그룹 공주님께서 사교계 주름잡아 주셔야지. 나도 아까 네 연락받은 다음에 바로 연락받은 건데, 라 칼마에서 크게 파티 열건가 봐. 난 가서 요리나 하겠지만, 너한테는 곧 초대장 갈걸?”
“오, 라 칼마에서? 언제?”
“9월 마지막주 금요일 밤.”
“알아는 둘게. 봐서 연아 데리고 가면 되겠다. 정보 고마워.”
신겸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손을 흔들었다.
“별말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