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오지 않았어?”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 뭐라 답해야 할지. 인간에게 마냥 모든 걸 터 놓을 수 없는 존재라, 나무아래는 그저 다른 곳에 일이 있었노라고 답했다.
그러던 중 오두막에 쌓여있는 말린 풀꽃이 눈에 들어왔다. 어렴풋하게 낯선 인간의 냄새가 섞여있었다.
‘그렇구나. 내가 오지 않은 사이에 다른 이의 눈에도 띄었구나. 하긴, 이렇게도 곱게 피었으니.’
연아를 내려다보며 조금은 씁쓸해졌다. 나만 숨겨두고 보고 싶었는데. 아무도 모르게. 깊은 숲에 피어난 꽃처럼. 하지만 그건 신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사랑해야 하며, 인간의 모든 것을 사랑하되 사사로운 감정은 드러내서는 안 되는.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은데.’
강렬하게 밀려오는 감정은, 소유욕이었다. 연아는 내가 키운 아이였다. 산과, 내가.
이 어린 신에게 욕심을 다스리는 일은 어려운 것이었다. 처음으로 갖고 싶은 것이 생겨버렸다. 품 안에 뛰고 있는 따스한 심장의 온기가 탐이 났다. 저절로 연아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나의 것이다. 순식간에 이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울렸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가져서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너무 꼭 안았던지, 연아가 바르작댔다. 작은 토끼 같았다. 동그랗게 올려 뜬 눈이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나무아래는 가까스로 이성을 잡아채 평온을 가장했다.
팔에 힘이 풀리자 연아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꼭 그 거리만큼 애가 탔다. 그래서 나무아래는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왜 그래?”
연아가 물었다.
“저, 꽃.”
“응.”
“소중해?”
연아는 잠시 생각했다. 소중하냐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였다. 버리기엔 좀 아까워서, 그저 그럴 뿐이어서 그 자리에 둔 것이니까. 고개를 젓는 연아를 보고 나무아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곱게 접히는 눈, 빙긋이 올라간 붉은 입술을 보고 연아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다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무아래가 한걸음 다가갔다. 왜, 내게서 멀어지는데?
연아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뒤로 돌아섰다. 붉어진 뺨이 사랑스러워, 나무아래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여름의 긴 해가 기울 때까지 둘은 머뭇거리며 서로를 의식했다.
***
다행히 다음날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달까, 서로에게 익숙해졌달까, 전날처럼 어색하지 않았다.
그들의 일과는 비슷한 듯 달라졌다.
텃밭을 가꾸고, 같이 산을 거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수록 애틋함이 자라났다. 연아는 새삼스레 부끄러워하면서도 나무아래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고, 나무아래는 기꺼이 그 작은 손을 부여잡았다.
이 산의 나무들은 신이 오래 머물러 준 덕에 무럭무럭 자라, 다른 산들에 비해 숲이 울창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나무 아래에서, 둘은 미래를 이야기했다.
“나무아래, 너는 앞으로도 여름에만 오겠지?”
“……응. 미안해.”
“어쩔 수 없는 거지?”
“응. 그래도 여름마다 꼭 올게.”
“그럼, 매 년 기다려도 되는 거지?”
지난여름처럼, 기약 없이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지?
연아의 눈동자가 나뭇잎 사이를 파고든 햇빛을 담아 반짝였다. 대답을 들을 때까지 눈도 깜빡이지 않으려나 보다. 다갈색 눈동자가 온전히 자신만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나무아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산딸기 같은 입술을 머금었다.
촉, 하고 떨어지는 입술에 놀란 연아가 그제야 눈을 깜빡였다.
“응. 기다려 줘.”
만약 내가 늦을 땐 여기로 와. 이 나무 아래로. 혹시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로 와. 나무가 지켜줄 거야.
낮은 목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 조용히 하는 말에 무조건적인 믿음이 생겨, 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 나무를 다시 한번 기억했다. 응,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여기로 올게.
그리고 가을은 또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별은 준비한다고 무뎌지는 게 아니더라. 연아는 여름이 아니어도, 무슨 일이 없어도, 가장 큰 나무를 찾아왔다. 나무는 어쩐지 나무아래처럼, 따뜻하고도 든든했다. 그래서 연아는 나무에 대고 별 것 아닌 일들을 조잘대며 머물렀다.
다음 해 여름, 나무아래는 연아가 품에 안아 들기도 버거울 정도의 커다란 꽃묶음을 가지고 나타났고, 그다음 해 여름엔 고운 옥가락지를 가져와 약지에 끼워줬다.
“나는 줄 게 없는데.”
“괜찮아. 그냥, ……너를, 줘. 나랑 혼인하자. 연아야.”
“아!”
고운 입술이 벌어지고, 그 사이를 놓칠세라 얼른 파고든 나무아래가 달게 입을 축였다.
“항상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같이 있지 못하는 시간보다 더 많이 널 그리워해.”
나무아래는 울 것 같은 미소로 고백해 왔다.
“널 사랑해. 세상에서 널 가장 아껴, 내가.”
연아는 이 고백이 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나무아래의 그 크고도 뜨거운 사랑은 절절하게 전해져 와,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나도, 나도 널 사랑해. 나무아래야. 네가 너무 좋아.”
연아를 그대로 품에 안은 나무아래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도, 기쁠 수가 있구나.”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억지를 부리고 떼를 쓰듯 욕심을 냈지만, 신으로서의 의무만 게을리하지 않으면, 너의 평생을 내가 함께 할 수 있어. 나무아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둘은 내년 여름에 둘만의 혼인식을 올리기로 했다. 바로 그 나무 아래에서. 비록 여름에만 만날 수 있는 부부지만 영원한 행복을 약속했다.
둘이 나무둥치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연아가 무언가 떠오른 듯,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종종걸음으로 이곳, 저곳을 오고 갔다. 나무아래는 그런 그녀가 마냥 사랑스러웠다. 어떠한 작은 산짐승도, 세상 어떤 생명도 연아보다 귀엽진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정도였으니까.
잠시 후 연아가 다가오더니 눈을 감으란다. 나무아래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이번엔 손을 달란다. 또 순순히 손을 내주었다. 아니, 이 손 말고, 왼손.
조몰락거리는 느낌이 나더니, 약지에 무언가가 끼워졌다.
“눈 떠 봐.”
“……아.”
나무아래의 약지에는 작은 꽃들을 엮어 만든 꽃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랬더니 입을 떴다고.
반지가, 그리고 반지에 담긴 마음이 너무나 어여뻐서 입이 저절로 벌어진 걸 어쩌란 거야. 반지만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나무아래의 볼에 수줍게 연아의 입술이 닿아왔다.
사랑스러운 것이 사랑스러운 행동만 하는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무아래는 연아를 붙잡아 꼭 안았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신도 그것은 하지 못해 그들의 여름은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다.
***
‘올해 혼인하기로 했는데. 내가 다른 세상으로 떨어져 버렸으니. 이를 어째.’
“여름에, 혼인하기로 했어요.”
연아가 말하자, 윤숙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올해 스무 살 이랬잖아. 결혼을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니?”
“하지만,”
“그래요. 요즘 누가 스무 살에 결혼을 해요.”
괜히 지훈이 딴지를 걸었다.
“결혼식장은 어딘데?”
재경이 물었다.
“결혼식장이요? 그냥 나무 앞에서 둘이 하려고 했는데요.”
연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아야. 미쳤어?”
얘가 이렇게 아무것도 몰라요. 심지어 이렇게 이쁜 애를 데려가면서 제대로 식도 안 올려? 미친 거 아냐, 그 남자? 재경이 다시 물었다.
“결혼하기로 한 남자는 누군데? 안 되겠어. 나 좀 소개시켜줘.”
“소개요? 안 돼요. 나무아래는 너무 잘생겨서 재경씨도 반하게 될지 몰라요.”
“에?”
이번엔 재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너 얼빠였어?”
“얼빠가 뭐예요?”
“잘생긴 얼굴 좋아하는 거.”
그렇다면 자신은 얼빠가 맞다. 연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재경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나무아래’라니. 어떻게 사람이름이 나무아래? 별명이지?”
“아뇨. 진짜 이름이래요. 신기하죠?”
“……어, 그, 그래. 내가 실례했어.”
이번엔 지훈이 나섰다.
“남자는 남자가 봐야 제대로 안다니까, 제가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저는 반할 일 없으니 괜찮죠? 연아씨?”
“여름이 되어서야 올 텐데.”
실은, 여기로 찾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그래도 괜찮다면 소개시켜드릴게요.”
연아가 확신 없는 말투로 말했다. 지훈은 왠지 모르게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연아와 같이 지내면서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름에 결혼해서 떠나갈 걸 생각하니 약간의 허탈함이 드는 것이다.
‘내가 뭐, 연아씨랑 어떻게 해보려고 한 건 아니지만.’
지훈이 어깨를 약간 늘어뜨리고는 제노를 산책시키러 나갔다.
연아는 여름까지 뭘 할지 윤숙, 재경과 함께 의논했다.
“대학은 나와야지.”
윤숙이 의견을 냈다. 당장 초등학교 졸업도 못했으니 검정고시를 치르기로 했다. 그 후로도 호운가는 연아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돕기로 했다. 윤숙이 말은 안 했지만 결혼도 도울 예정이었다. 그 와중에 양아치 같은 놈이 연아양을 데리고 가겠다고 나타난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생각까지 했다.
“대학은 한의대를 가는 거 어때? 너 약초에 대해 잘 알잖아. 맥도 잘 짚고.”
재경이 말했다. 다행히 이곳에도 약초로 병을 고치는 의학이 있는 모양이었다. 연아는 흥미가 생겨서 재경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재미있을 것 같아요. 공부해 볼게요.”
윤숙이 교과서며, 문제집이며, 필요한 것들을 사 오라고 지시했고, 재경은 인터넷으로 검정고시 일정을 살폈다. 상반기 시험은 접수기간이 지났기 때문에, 연아는 8월 초에 있는 하반기 시험을 봐야 했다.
연아는 인터넷 강의라는 걸 처음 봤을 때 사람이 실제로 네모난 화면 속에 들어가 있는 줄 알고 속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소리 지르며 뒷걸음질 칠뻔한 걸 겨우 참았더랬다. 그래도 재경의 설명을 들으며 차차 컴퓨터 사용방법도 익히고, 스마트폰의 사용법도 익히면서 새로운 문물에 익숙해져 갔다.
재경은 건강을 많이 되찾았지만 이제 마치 친자매처럼 여기게 된 연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해서 복학을 미뤘고, 가끔 둘이서 차를 타고 나가 쇼핑도 즐기면서 정을 쌓았다.
그렇게 짧은 봄이 지나가고 마침내 여름이 왔다.
연아는 신목이라 불리웠던 커다란 나무 앞에 앉아 공부하며 나무아래를 기다렸다. 공부가 잡히지 않는 날에는, 회사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하게 된 지훈을 대신해 제노를 산책시키며 산을 돌아다녔다.
그 해 같았다. 나무아래가 오지 않아 내내 기다렸던, 그 해.
그 해처럼, 연아가 초졸 검정고시를 치르고 통과할 때까지도 나무아래는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