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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홍차 Sep 24. 2024

나를 잊은 신이 재벌이 되었다. 10

10.

연아의 의식이 흐름을 멈췄다.


“방금, 뭐라고?”


 떨리는 목소리가 물었다.


 그러나 몇백 년이 넘는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세계적인 기업인 라 칼마의 회장쯤 되는 연도, 자신의 행동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라.


 한 손으로 연아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매만져주고 다른 한 손으로는 조심스럽게 연아의 볼을 쓰다듬은 후, 그제서야 자신이 처음 보는 이 자그마한 아가씨에게 실례를 했으며, 그에 대한 사과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수였습니다. 미안합니다.”


짜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얼굴이 옆으로 세차게 돌아갔다. 뺨을 맞을 줄은 알았지만, 다른 아가씨가 날릴 줄은 몰랐는데.


 재경이 씩씩거리며 오른손을 털었다.


 “그러니까 지금, 라 칼마의 회장님께서 내 동생을 보자마자 냅다 키스를 해놓고는 한다는 말이 ‘실수였습니다’? 맞아요?”


 “……맞습니다.”


 “하. 어이가 없네.”


 연의 비서가 라 칼마의 회장 곁으로 다가와 연아의 색으로 붉게 물든 입술을 닦아 내라고 손수건을 건넸다.


 ‘세상에, 여자에 대해선 목석같던 보스가 이렇게 큰 사고를 칠 줄이야.’


 그리고는 연아와 재경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 일은 저희 보스의 불찰이 맞습니다. 추후에 호운그룹에 적절한 보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연아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입맞춤이, 실수? 게다가 보상을 하겠다고?


 “보상 따위 필요 없어요.”


 대신, 자신이 나무아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남자를 향해 선언했다.


 “너, 다시는 나 볼 생각 하지 마.”


 그러자 연이 대번에 인상을 썼다. 이 여자를, 다시는 못 본다고? 벼락을 맞으면 이럴까. 심장이 순간 멈추는가 싶더니, 쥐어짜내지듯 아파왔다.


 “당신을, 못 보는 건, 내가 안 되겠는데.”


 낮은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앞에서 인상을 쓰고 중얼거리거나 말거나, 지훈은 바보같이 입을 떡 벌린 채 얼굴이 벌게져있었다.


 ‘젠장. 저 자식이 지금 뭐 하는 거야.’


 어쩌다 보니 뒤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게 된 지훈은, 연아가 키스를 당하는 순간 기분이 무지막지하게 더러웠다. 재경이 먼저 나서서 뺨을 쳐버리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을 뿐 자신도 주먹을 올릴 정도로.


 ‘왜 나는 연아씨가 나무아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대로 연아씨와 끝일 거라고 생각한 거지? 고작 약혼했을 뿐이잖아.’


 이렇게 연아의 뒤에 계속 뒤에 물러서만 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이에 서둘러 연아를 자신의 몸으로 가리고는, 라 칼마의 회장에게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요. 나는 연아씨의 ‘남자친구’이자 ‘보호자’로서, 방금 당신이 말한 ‘실수’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는 바입니다. 보상 확실히 하시고, 연아씨 말대로 앞으로 다시는 만날 생각 마십시오.”


 연아가 당황해서 지훈에게 소곤거렸다.


 “나, 남자친구요?”


 등뒤에서 들려오는 연아의 목소리에 지훈이 귀까지 벌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자기도 남자는 남자라고. 자기가 연아 좋아하는 것도 모르고 맨날 뒤에서만 쭈뼛대길래 언제 고백하나 했더니 결국 이렇게 일을 내는구나! 영 숙맥이면 연아 그냥 진짜 동생 삼으려고 했더니 그건 아니네.’


 재경이 속으로 키득거리며 나섰다.


 “그래! 여기 커플템 안 보여요? 지훈이 오빠 행커치프랑 우리 연아 드레스, 같은 원단으로 맞춘 건데.”


 “커플템? 남자친구, 말입니까?”


 이번엔 연이 되물었다. 과연, 지훈의 재킷에 꽂혀있는 행커치프는, 연아라는 아가씨의 연보라색 드레스와 같은 색의 원단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이상했다. 호운그룹 회장의 아들 안지훈이 본인의 뒤로 숨긴 저 여자는 분명 오늘 처음 만났는데 보자마자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물론 여자가 예쁘긴 했다. 예쁘긴 매우 예뻤지만, 예쁜 여자 하루이틀 본 것도 아닌데 오직 저 여자만은 달랐다.


 ‘이 여자는 나의 것이다.’


 그 생각은 너무도 강렬하여 부정할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온 말이 이거였다.


 “헤어지시죠. 두 분 하나도 안 어울립니다.”


 그 말에 화난 연아가 지훈의 등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삐약삐약 소리쳤다.


 “우리가 어울리든지 말든지! 나무아래도 아닌 당신이 무슨 상관이세요!”


 “내가 그 나무아래가 맞거나 아니거나, 어쨌든 당신은 나의 것이니까.”


 연아와, 재경, 지훈은 물론, 듣고 있던 비서와, 사람들을 물리느라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수행원들까지 분명히 들릴만한 소리로 그는 선언했다.


 “미쳤어?”

 “미쳤어요?”

 “미쳤습니까?”

 “보스, 미치셨습니까?”


 동시에 터져 나오는 말에 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미친 것일지도 몰랐다. 기억을 잃은 뒤, 살얼음판 같던 5백 년을 살아오는 동안 언제 이렇게 비이성적으로 행동한 적이 또 있었던가.


 ‘허!’ 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지훈이 몸을 돌려 연아를 잡아끌었다.


 “여기 더 있을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가시죠, 연아씨.”


 “그래.”


 재경이 맞장구를 쳤다.


 “저 사람, 네가 기다리던 나무아래씨도 아니라잖아. 예쁘니까 괜히 건드리고 난리야.”


 연아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더니,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머물러봤자 속상하기만 할 것 같았다. 저 남자, 나무아래가 분명한데 본인은 아니라 하니 계속 우길 수도 없고 말이다.


 “네. ……아닌가 봐요.”


 내가 기다리던, 나의, 나무아래가.


 

***



 연은 떠나가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참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내민 손을 거두게 했다.


 그녀가 없는 파티는 이미 안중에 없었다. 그는 그대로 수행원을 물리고 그가 머물고 있는 룸으로 향했다.


탁-


 문을 닫고 조용히 읊조려 본다.


 “연아.”


 연아라고 했지. 그 여자.


 이름이, 나랑 비슷하네.


 “연아야.”


 연아를 부르던 연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가슴이 메었다.


 ‘나의, 연아.’


 아까부터 머릿속을 지배하는 말. 흘러넘치는 소유욕이 낯설었다. 연은 엄지로 자신의 입술을 쓸었다. 아까의 키스는 마치 사고와도 같았다. 삶의 근간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아찔한 느낌. 그러나, 오늘 처음 만난 그녀가 낯설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풀꽃향기가 났어.”


 너무나도 그리운.


 그리워한다는 것조차 잊고 지냈던, 아득한 그리움이었다.


 ‘혹시, 정말 날 알고 있던 건 아닐까.’


 연은 곧 고개를 저었다.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냈다. 그는 기억을 잃은 채 5백 년을 살았다. 다른 인간은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 과거의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여태껏 살아있을 리가 없다.


 그럼 뭐였을까. 그 확신에 찬 다갈색 눈동자는.


 눈동자에 가득했던 확신이 원망으로 바뀔 때의, 나의 안타까움은.


 ‘알아내야겠다.’


 연은 비서를 호출했다.


 엉망진창이 된 파티를 수습하던 중에 호출된 비서는, 언제나 냉철하게 상황을 이끌어가던 그의 보스에게서 지금 이 상황에 맞지 않는 황당한 말을 들어야 했다.


 “아까 그 연아라는 여자에 대해 전부 다 조사해 와. 그 호운그룹 회장 아들이랑 무슨 사이인지도 확실하게 알아보고.”


 ‘보스가, 여자를?’


 비서가 처음 듣는 업무 지시에, 급히 표정관리를 하고 나갔다. 그 후에도 연은 밤새 창가를 서성이고, 침대에 누워 뒤척이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까무룩 잠이 들었다.


 연의 주변은 온통 암흑으로 뒤덮였다. 아무리 빛을 찾아봐도 소용없는, 그 꿈이다.


 사지는 여전히 묶여있다. 그는 다시,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몸부림친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떠오른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는 건데. 해답이 없는 물음에 그가 다시 어둠에 잠식되려 할 때,


 ‘나무아래야.’


 멀리서, 맑은 종처럼 울리는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한 빛이 되었다.


 “……갈게, 지금.”


 가야 한다. 저곳으로. 더 늦지 않게.


 그의 사지를 결박하던 것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모든 힘을 짜내어 한걸음을 옮겼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던 전과는 달라졌다.


 꿈이, 바뀌었다.



***



 여름에 온다던 약혼자가 오지 않아 울적해하는 연아를 달래주려 파티에 데려갔다가, 엄한 놈한테 귀한 입술만 뺏기고 돌아왔다. 그러나 아예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오, 연아 남자친구분.”


 “하지 마라.”


 라 칼마의 파티가 끝난 며칠 뒤 재경과 지훈이 연아 없이 따로 만났다. 재경이 지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게 어물쩍 고백하고 끝은 아니겠지?”


 “고, 고백. 제대로 할 거야.”


 지훈의 얼굴이 또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 그렇게 숙맥 아니거든.”


 “거기 벌겋게 된 얼굴이나 어떻게 하고 그런 말을 해야지. 거울 보여줘?”


 재경이 지훈을 놀리며 큭큭 웃었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연아는 파티에 다녀온 뒤 점점 더 생기를 잃어갔다. 툭하면 끼니도 거르고 멍하니 있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 공부는 또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재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연아 저러다 쓰러지겠어.”


 “……정말 라 칼마의 회장이 나무아래라는 놈 맞을까?”


 “나야 모르지. 근데 일단 본인이 아니라잖아.”


 “연아씨는 그 남자 목소리 듣자마자 나무아래라고 했잖아. 얼굴도 봤고. 자기 약혼자를 착각할 수도 있나?”


 “착각하기 쉽지 않은 피지컬이긴 했어. 라 칼마의 회장, 여태 완전 신비주의라 몰랐는데 키도 크고 멀끔하니 진짜 잘생기긴 잘생겼더라.”


 “그래서 연아씨 말대로, 잘생겨서 반했냐?”


 “미쳤냐? 그런 상또라이한테 반하게. 연아 보자마자 입술부터 덮친 놈이야. 심지어 그렇게 사람 많은 데서. 암만 잘생겼어도 그건 아니지.”


 “농담이다.”


 “아무튼, 나는 농담이 아니라, 오빠가 제대로 꼬셔보라는 말이야. 연아 좋아하는 건 맞잖아.”


 “어, 뭐, 그렇지.”


 지훈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남매는 그 후로 한참 동안 ‘송연아 꼬시기’ 플랜을 세웠다. 그러나 지훈은 회사 물려받는다고 공부만 하느라, 재경은 아파서 누워만 있느라 어디 제대로 된 연애를 해봤어야지. 둘이 머리를 맞대고 짜낸 계획이라는 게, 멋있게 꾸미고 연아 공부 도와주기, 멋있게 꾸미고 연아 맛있는 거 먹이기, 멋있게 꾸미고 연아와 함께 제노 산책시키기……. 이런 것들뿐이었다.


 “오빠. 미안한데, 생긴 것부터 망한 거 같아. 동생으로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그 남자한테 오빠가 밀려. 매일 샵에 갔다가 연아 만나는 건 무리고.”


 “하…….”


 ‘미치겠군.’


 지훈은 슬프게도 재경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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