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운. 없애버릴까.”
그러면 송연아가 내게 올까.
연은 스스로도 어이없어하며 손바닥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답답해. 타이를 풀고 의자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했다. 창에 비친 연의 얼굴이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감정이지?’
둘이 웃고 있는 모습에 화가 나서 남자 쪽 회사를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건 뭐고. 당장이라도 여자를 데려와서 내 옆에 앉혀놓고, 나만 보고 웃어달라고 윽박지르고, 애원이라도 해봐야 할 것 같은 이 불안감은 뭐냐고.
지금 이 감정은 너무 파괴적이고, 너무,
“……비신사적인 감정이군.”
그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 기분대로 움직였다가는 될 일도 안 되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에, 치밀어 오르는 이 ‘질투’라는 감정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는가? Yes.
그럼, 그녀가 안지훈과 행복하길 바라는가? No.
그렇다면 안지훈에게서 그녀를 빼앗아와야지.
그러고 보니 호운그룹이 그녀의 뒤를 봐준다고 했었는데. 과연 내가 나서면 호운그룹이 움직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게 걸림돌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거슬려. 호운그룹이 움직이면 라 칼마도 움직일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요정처럼 팔랑팔랑 나타난 그녀는 내 삶을 이렇게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회사의 힘을 오직 물질적인 이익만을 위해서 움직였는데, 사적인 감정으로 휘두를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그녀를 내 곁에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상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사진 중 연아만 찍힌 것으로 집어 들었다. 송연아. 이렇게 곱게 웃을 거면, 다른 놈 말고 내 앞에서 웃어주는 게 어때. 난 널 만난 뒤로 점점 미쳐가는 것 같은데.
***
스케이트를 타고, 벤치에 앉아서 김밥을 먹고, 공원을 좀 걸은 후 연아와 함께 저녁까지 야무지게 먹은 지훈은 이대로 헤어지기가 너무 아쉬웠다.
“연아씨. 우리 와인 한 잔 할까요?”
“와인이요? 그건 뭔가요?”
연아가 천진하게 되물었다. 지훈은 이제 연아의 이런 순수함도 좋았다.
“포도를 숙성시켜 만든 술이에요.”
“아, 머루주 같은 거구나!”
“맞아요.”
연아는 잠시 옛 기억을 떠올렸다. 어릴 적 아버지가 담그시던 머루주에서는 달콤한 향이 났었는데. 그땐 아직 어려서 안된다고 마시지 못하게 하셔서 맛은 못 봤지만 지금은, 한 잔쯤은 괜찮을 거야. 나도 이제 어른인걸.
“네. 마셔보고 싶어요.”
지훈은 연아와 제대로 데이트하는 기분이 들어 웃는 낯을 숨기지 못하고, 친구들과 몇 번 가 본 청담동의 와인바로 연아를 안내했다. 헤실헤실 풀어진 그 표정은 오직 연아앞에서만 나오는 것임에도, 연아는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이 오빠가 오늘 기분이 좋은가보다.’ 할 뿐이었다.
“형님. 저 왔어요.”
지훈이 바에서 와인잔을 닦고 있던 사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연아도 뒤따라 들어가며 조그맣게 인사를 했다.
“와우, 지훈씨! 애인분?”
“에이, 아닙니다. 형님, 그거 있어요? 샤토 디켐.”
지훈은 언젠가 친구들이 여자 꼬실 때 꼭 마시라던 걸 기억해 내곤 속삭였다. 와인바 사장은 귀신같이 알아듣고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윙크했다.
“아하. 2017 빈티지는 있어요. 아시겠지만, 디켐은 어려도 충분히 훌륭한 아이예요.”
“좋네요. 그거랑, 안주는 형님이 알아서 내주세요.”
“예. 그럼 자리는, 야경이 보이는 창가가 좋겠네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안내를 받으며 따라간 곳은 의외로 벽으로 막혀있는 프라이빗한 공간이었다. 자그마한 테이블이 놓여있고,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창밖을 볼 수 있게 되어있었다. 지훈이 만족스러운 엄지 척을 해 보였고,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엄지를 내보였다.
연아는 두 사람이 엄지를 들어 올리고 눈을 찡긋거리며 무슨 작당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남자들이 하는 짓의 대부분은 무시해도 된다던 재경의 말을 떠올리고 그냥 넘겼다. 같이 엄지를 들어 올리기도 뭐 하니까. 보고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 자리에 앉았다.
와인은 금방 준비되었다. 안주는 무화과와 브리치즈, 크래커가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 나왔다.
“지훈씨가 시음하시겠어요?”
“그럴까요?”
와인잔에 황금빛 액체가 고이고, 상큼하고 녹진한 향이 화악, 퍼졌다.
“샤토 디켐 2017 빈티지는 레몬껍질, 바닐라 크림, 말린 파인애플 등의 향이 특징입니다. 입에 머금으면 섬세하고 향기로우면서도 스파이시함이 느껴지고요. 풀바디의 맛과 아로마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타입으로, 과하지 않은 당도와 훌륭한 피니쉬가 장점이죠.”
“음!”
지훈이 감탄하며 시음을 하는 동안, 연아가 사장님의 설명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잔을 내밀며 발을 가볍게 동동 굴렀다. 옆에서 풍겨오는 향과 설명을 함께 들으니 얼른 맛을 보고 싶어 졌기 때문이었다.
온몸으로 표현하는 ‘저도 빨리 주세요’에, 두 남자가 미소 지었다. 서울 시내에 이렇게 귀여운 생명체가 있다니. 비현실적인 현상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 정적에서 그나마 빨리 깨어난 지훈이 눈짓하자 사장이 얼른 와인병을 들어 올렸다. 연아가 급히 배운 와인 매너로, 잔을 한 손으로 들어 공손히 내밀었다.
잔이 채워지자, 연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손에 들린 황금빛 신의 물방울을 감상했다.
“와아! 색이 정말 고와요!”
“이렇게, 부드럽게 돌리고 향을 맡는 거예요.”
지훈이 연아의 손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 잔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연아가 지훈의 품에 기댄 모양새가 되었다. 지훈은 세차게 뛰는 자신의 심장을, 맞닿은 연아에게 들킬까 봐 걱정되었다. 사장은 눈치껏 빠져주었고, 다행인지 연아는 지훈보다는 와인에 신경을 뺏겨서 입술에 잔을 대고 기울이고 있었다.
‘너무 예쁘잖아.’
순간, 지훈은 저 와인이 되고 싶었다. 저 빨간 입술에 닿고, 그 안을 헤집고 들어가 그녀의 감각을 모두 빼앗고 싶었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연아야.”
“오빠! 이거 진짜 맛있어요!”
둘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지훈은 모처럼 용기를 내 연아의 이름을 부른 것이 묻혔지만 연아의 밝은 목소리에 그냥 묻힌 채로 두기로 했다.
“입에 맞으니 다행이에요.”
“상큼하면서 부드럽고 달달한 게 꿀 같아요! 이거 많이 비싼가요? 저 더 마셔도 돼요?”
“별로 안 비싸요. 다 마셔도 돼요.”
의외로 술을 좋아하네. 지훈이 여기 데려오길 잘했다며 속으로 뿌듯해했다. 문제는, 연아의 주량을 둘 다 몰랐다는 것이었다. 샤토 디켐 한 병을 다 비웠을 때였다.
연아가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꼬며 웃었다.
“헤헤.”
“……취했네.”
“네. 취하셨네요.”
새벽 1시가 다 되어갔고, 하남까지 내려가기엔 지훈도 술을 마셔 피곤했다.
“호텔 예약 도와드릴까요?”
와인바의 사장이 호의를 베풀었다.
‘호텔?’
갑자기 얼굴과 귀가 빨개진 지훈을 보며 사장이 웃었다.
“하여튼 도련님 순진하시다니까.”
“형님, 회사 그만두신 지가 언젠데 아직도 도련님이에요.”
“크크, 아까는 ‘지훈씨’라고 착실히 불러드렸습니다. 호운에 방 두 개 잡을게요. 쉬고 계세요.”
“네. 고마워요, 형님.”
잠시 후,
“어떡하죠. 만실이랍니다. 다른 곳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까운 데가 어디 있죠? 최고급으로 데려가고 싶은데.”
“가까운 곳 중 최고급이라면 라 칼마가 있네요.”
사장의 말에 지훈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라 칼마의 회장이 생각난 탓이다.
“라 칼마…….”
그때, 사라락, 지훈의 어깨에 연아의 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연아가 지훈에게 기대서 졸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라 칼마호텔이 좋긴 하지. 거기라도 가야지 뭐. 설마 그 자식을 만나기라도 하겠어?
***
이런 미친 클리셰.
연아를 부축해서 호텔로 들어가려던 지훈의 앞을 라 칼마의 회장이 떡하니 가로막고 섰다. 지훈이 그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연 역시 두 사람을 보며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여자, 여기에 두고, 가십시오.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뭔 개소리를 그렇게 참신하게 합니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꼴은, 절대로 더는 못 보겠으니까, 송연아씨 놓고 꺼지라고.”
“댁이 뭔데. 연아 약혼자도 아니라면서.”
지훈이 연아를 더 꼭 붙잡았다. 약혼자도 아니라는 놈이 왜 이렇게 달려들어, 왜 이렇게까지 이 여자를 가지지 못해서 안달이 났지?
“어쨌든 난 지금의 당신과는 다룰 수 있는 힘의 크기가 다르지.”
연이 고갯짓 하자 수행원들이 달려들어 지훈과 연아를 떼어놓았다. 지훈이 몸부림쳤으나 역부족이었다.
“연아야! 정신 차려봐! 제발!”
지훈의 외침에 연아가 눈을 떴다.
“어? 지훈이 오빠? ……이 아저씨들은 누구예요?”
“읍! 으읍!!!”
수행원들이 지훈의 입을 막고 차에 강제로 태웠다.
“어어?”
술이 깨지 않은 상태인 연아는 상황파악이 느렸다. 지훈을 향해 달려가려 했지만 팔은 수행원들에게 잡힌 상태고,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송연아. 나한테 와야지.”
그때 들려오는 나무아래의 목소리.
“아? 나무아래야?”
“날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으니, 와서 안겨.”
“진짜, 나무아래야?”
연아는 울먹이며 한걸음 한걸음 연에게 다가갔다. 수행원들도 어느새 팔을 놓아주었다.
“왜 이제야 왔어?”
지끈-!!!!!!
연의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왜 울어.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기억나지 않는 언젠가처럼 무조건적으로 잘못을 빌어야 할 것 같은 느낌과, 폭 안겨오는 작은 여인이 주는 끝없는 안정감이 교차했다.
“바람이 차니까, 들어가자.”
“난 네 품이 따뜻해서 괜찮은데.”
“그래도 밖에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
“알았어.”
둘은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한 명은 잊힌 기억의 빈자리가, 한 명은 잊힐 기억의 빈자리가 클, 그런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