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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

훌륭한 작품들을 볼 때마다 작가들에게 감탄하는 부분. 바로, 디테일이다. 새삼 놀랍게도, 작가들은 우리가 그들보다 더 많이 스쳤을지 모를 면면을 아주 상세히 묘사해낸다. 그들은 위대한 관찰자들이다. 또한, 다양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이 넘치는 인물들이다. 그 어떤 것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호기심을 품고, 면밀하게 관찰해내는 능력. 또한, 그것을 기억, 또는 기록해둬, 작품의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재치. 이것들을 마주할 때면, 실로 놀랍다.


사실 디테일은, 작가들만이 타고난 능력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들에게만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 능력이 있다면, 보다 많은 영역에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디테일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관심과 집중으로부터 기인되는 것이다. 테이블 위, 찻잔 받침이 아이스볼로 인해 부풀어 오르내리는 것을 우리는 '되새겨보면' 고개 끄덕이며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면밀히 관찰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걸 왜 관찰해야 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상황이 어떤 사람들의 관계, 또는 한 인물의 내면의 상징 요소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꽤 관찰할 만한 상황이 될 수 있다.

디테일하게 관찰하고 디테일하게 풀어낸다는 것은, 작가들의 작업인 동시에 고충이다. 물론, 고충이 아닌 즐거움일 수도 있겠다. 이 감정에 대해선 답을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작가라면 확실히 디테일한 관찰과 표현력이 요구된다. 이것으로부터 작가와 작품의 평가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으니까.

요즘 들어, 디테일이 뛰어난 작품들을 접할 때면 이전보다 더 깊은 경외심을 품곤 한다. '상상 이상의' 디테일을 발견할 때면, 절로 혀를 내두르곤 한다. 그런 작품들과 마주할 때는, 뒤통수의 찌릿함을 느끼곤 한다. '와-' 의식하지 못한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말이다. 결코, 평소에 내가 조금도 상상, 혹은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순간의 전율. 그것 또한 표현력 부족한 나는, 묘사해내기가 쉽지 않다.

지금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는 중이고, 그의 디테일한 묘사에 감탄, 또 감탄하는 중이다. 얼마 전, 전시회를 통해 감상했던 샤갈의 손그림들에서도 그 기분을 느꼈는데, 음. 요즘 들어, 이런 기회가 잦아지고 있어서 재미있다. 이런 걸 두고 소확행, 이라고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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