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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유레루>

모든 흔들리는 것들

영화는 형제가 처한 사건의 심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두 형제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고, 성향도 정반대되는 인물이다. 이 캐릭터의 간극만으로도 영화가 불안 위를 걸을 것임은 충분히 예상된다.

영화는 다케루의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머니의 기일을 맞아 오랜만에 고향 오키나와로 향하는 다케루는, 도쿄에서 잘 나가는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들른 형 미노루가 운영 중인 주유소에서, 옛정이 있는 주유소 직원 치에코와 조우한다. 이후, 다케루와 미노루, 그리고 치에코는 추억이 배어있는 계곡으로 놀러가고, 거기에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다케루가 흔들리는 다리를 건너 사진을 찍으러 간 사이, 그 다리를 건너려던 치에코가 추락해 죽은 것이다.



<유레루>는 이 사건에 대해, 치에코가 사고에 의해 추락한 것인지, 미노루에 의해 추락하게 된 것인지를 밝혀나간다. '흔들리다'는 뜻을 지닌 제목 '유레루(ゆれる)'는,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일어난 사건을 의미함과 동시에 법정에 선 두 형제 간의 흔들리는 우애, 그리고 흔들리는 개인의 상황과 내면 모두를 내포하고 있다.

미노루가 살인 혐의를 받자, 가족과 다케루는 모두 그를 돕는 데 집중한다. 늘 형에게 도움을 받고, 형의 많은 부분들 빼앗아만 왔던 다케라가 이번에는 형을 돕고자, 진실을 은폐하면서까지 변호에 나선다. 다케루의 은폐에는, 사건 현장을 목격했다는 점과 형이 마음에 두고 있는 치에코와 전날 밤을 함께 보냈다는 점이다. 하여, 치에코는 미노루의 손길을 뿌리치고 도망치려다 추락사에 이른 것이다. 이 사건. 실질적으론 사고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한 피살인 것일까.



영화는, 현 상황과 사건 당일의 회상 신을 교차하며 '실체'를 하나, 둘씩 꺼내 보여준다. 제목뿐 아니라, 주목해야 할 점은 주인공의 이름이다. 사납게 울부짖고 흥분한다는 의미를 지닌 다케루(たける)의 이름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압축한다고 볼 수 있다. 형을 돕겠다고 나선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초심과는 다른 마음을 먹는다. 물론, 그에게도 충분한 이유는 있다. 순박하다고 믿어왔던 형의 말을 듣고 혼란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미노루에게 치명적인 증언을 한다.



이번 사건 외에도 형제에게는 그 간의 숱한 사건들이 있어왔다. 시골에서 부모님의 뜻에 따라 살아 온 순박한 형과 대도시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동생의 상황은 확연히 다르다. 미노루의 삶은 정박한 배에 비유된다면, 다케루의 삶은 유목민에 가깝다. 자유롭고 즉흥적이다. 제목과 이름의 의미를 온 몸에 안은 인물이다. 이 삶은, 아무리 바꾸려 해도 바뀌지 않는다. 흔들리는 다리를 유유히 건넜던 다케루와는 달리, 미노루에게는 끔찍한 사건의 현장이자 불안의 공간이다. 다리를 건너, 다른 삶을 지향하고자 했지만 결국 미노루를 정박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고 만다.

영화의 말미에 다케루의 회상에 의해 보여지는 다양한 흔들림의 상징물들은, 다케루 스스로를 반성하게 만든다. '누가 봐도 분명하다. 끝까지 내가 빼앗고 형이 빼앗겼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헛되게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위태롭고도 단단히 걸린 가느다란 다리의 발판을 헛디딘 건 나였다. 지금 내 눈엔 분명한 광경이다. 썩은 발판이 살아나고 쇠한 난간으로 버티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 다리는 아직도 걸려있을까.'


<유레루> 속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흔들린다. 사건의 실체 역시, 그 어떤 누구도 정확히 밝히지 못한다. 미노루는 치에코를 구하려 한 것일까, 혹은 죽인 것일까. 사건에 대한 모호함, 무너진 형제와 가족애. 이 모든 흔들림으로 인해, 영화를 보는 이들도 찝찝함과 불안한 감정을 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체와 허상, 말과 내면. 영화는, 이 같은 것들의 이중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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