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변신>

이만큼 애달픈 이야기가 또 있을까

변신 1.jpg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하는 그레고르 잠자. 외판원인 그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보니 한 마리의 벌레가 되어있었다. 이 꿈 같은,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은 '현실'이다. 그레고르의 가족들은 모두 놀라 어안이 벙벙한 상황. 열일곱 살의 꿈 많은 누이동생과 지금은 마땅한 수익이 없는 부모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던 그에게 닥친 청천벽력. 앞날은 어떻게 이어질까.


아수라장. 잠자씨 집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풍비박산이 된다. 그의 가족들은 아무도 혼자서는 집에 있으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레고르의 방문을 열어젖혀 그에게 접근하려고도 들지 않았다. '그나마' 누이동생이 끼니를 챙겨주며, 그레고르의 상황을 체크할 뿐이었다. 그야말로 '벌레 취급' 제대로 당하는 그에 대한 가족들의 태도는, 사랑하는 아들, 오빠가 아닌 '치워버리고 내보내야 할' 대상이 된다. 그들은 그레고르의 방을, 그가 아끼던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저 '기어다니는 일'이 전부인 그레고르에게, 사실 상 물건 따위는 필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의 '정신'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 동안의 추억이 깃들어 있다. 냉정한 가족들은, 그렇게 가족의 일원을 제거해나간다.


이런 애달픈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처지보다 가족에 대한 걱정에 앞서 있다. 자신 외에는 생계 활동을 하지 않는 가정을 걱정하고, 남 몰래 쌓아왔던 동생을 향한 애정을 발휘하지 못하게 돼 슬퍼한다. 자신의 모습보다 현 '상황'에 수치와 슬픔을 느끼는 그는, 상황과 사람 모두로부터의 피해자가 된다.


그레고르를 처음 본 인물들은, 그를 한낱 쇠똥구리로밖에 취급하지 않는다. 생명은 있지만 사람은 아닌, 죽으면 간단히 치워버릴 수 있는 그런 미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더한 것은 가족들이다. 누이동생의 애정은 식어만 가고, 그레고르와 접촉하면 마치 전염이라도 될 거라는 듯이 '따로 지정해 둔 접시'에 음식을 전하는가 하면, 그 음식의 수준마저도 점점 떨어진다. 엄마는 그레고르의 기어다님에 경악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과 폭탄세례를 날려 등에 그것을 꽂는다. 이 때문에 그레고르는 한 달 이상을 심한 부상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렇게 그레고르는 점점 죽어간다. 결국, 믿었던 누이동생마저 오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이게 오빠라는 생각은 버려야 해요. 내보내야 해요." 이렇게 가족들은 그레고르에게 몸과 내면의 상처를 남기고, 결국 벌레로 변신했던 한 인물은 사라진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잊혀진다. 아니, 잊혀지는 것보다 더 잔인한 것은, 그가 사라진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을 축복한다. 슬프다. 애달프다. 만약 내가 그레고르 잠자였다면. 그리고 내 가족이 이들과 같은 양상을 보였다면 어땠을까. 이만큼 슬픈 일도 없다.


프란츠 카프카는, 이 놀라운 캐릭터와 그를 두고 일어나는 상황들을 짖궂게 표현함으로써 사회와 개인을 풍자한다.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의 행동 변화와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한 인물의 잔인한 변이를 통해 사회(집단) 속 희생양의 처참함을 보여준다.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비극의 연속을 경험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희비극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변신된 자신에 적응해나가는 그레고르 잠자의 일기는 서글픈 동시에 우스꽝스럽게 묘사되는데, 이 상황을 연극으로 그려낸다면 그야말로 웃픈 부조리극이 된다. 킥킥대며 웃을 수 있겠지만, 정작 자신이 그레고르의 상황에 처한다면 그래도 웃을 수 있을까? 과연, 이런 어이 없는 변신과 가족의 냉대와 멸시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절대, 못할 일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 작품. 이만큼 애달프고도 참신한 소설도 없을 것이다. 카프카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풍자 소설가로는 니콜라이 고골이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외투>, <코> 등도 읽어보시기를 추천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