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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어느 작가의 오후>

작가가 본 동요하는 풍경들

<어느 작가의 오후>는 소설이라곤 하지만 소설이 아닌 에세이 같다. 책은 12월의 어느 날 오후, 한 작가가 그날의 글을 쓴 후 외출 후 그의 '내면'이 본 풍경들을 묘사한다.


작가, 그에게 있어 '사건'은 '내면의 언어'들로 구성돼 있다. 외부적인, 그러니까 독자의 입장에서 사건이라 부를 만한 '진짜 사건'은 없다. 위태롭고 불안하며 흔들리는 풍경들은 바깥이 아닌 작가 '안'에 있다.


그래서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풍경의 묘사들에서 '뾰족함'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풍경묘사가 아닌,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생경한 느낌…. 사실, 페터 한트케의 작품들에서 그러한 '낯섦'은 줄곧 느껴왔지만 내겐 <어느 작가의 오후>가 유달리 그러했다. 여느 작가들보다 '형식'을 중요시 여기는 그는 그래서 그것들을 파괴한다. 책 속 작가처럼 사건에 집중하기보다는 언어 그 자체에 대해 중점을 두는 그는 묘사에 있어서도 여지껏 보아왔던 것들과 '다름'을 명백히 보여준다.


모든 글들을 독백으로 볼 수 있었고, 이것이 1인극(희곡)으로 쓰인다면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할 것 같다. 결국, <어느 작가의 오후> 속 작가는 페터 한트케 자신이 아닐까(거의 명백하다고 본다)? 내면의 딜레마가 바라본 풍경들은 불안정하다. 비단 페터 한트케 그만에 국한된 것이 아닌, 작가들이라면 한 번 쯤 고충거리로 여겨졌을 법한 '내적 고뇌'들이 그려진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물들은 현실과 망상을 제대로 구분짓지 못한 채 걸어다닌다. 싸구려 음식점에도 들르고, 가판대에서 신문도 사지만 그의 흔들리는 내면은 육체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대중(독자)들을 상대로 하는 작가들은 그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 의식의 강박관념은 망상과 착각으로 이어진다. '재료보다는 구조(형식)가 중요한 것'이라 여겨왔던 작가는 모든 외부 요소들을 자유로이 놓아두고 관찰하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아보인다. 자신에게 적대감을 표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검은 옷을 '입히고', "당신의 문학을 기소합니다!"라는 통고의 행동을 짓게 '만든다'. 결국 그는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오고' 그의 묘사를 읽는 나도 머릿속에서 '소용돌이를 만난 기분'이었다.


사건이 없지만 엄청난 사건들이 작가의 망상 위에서 펼쳐지는데, 어쩌면 그 망상 혹은 상상들이 작가들의 원천(소재)거리들이 아닐까. 책을 읽는 동안 묘사에 집중하기에 앞서, 작가들의 고충에 대한 연민이 더 짙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12월, 첫눈이 내린 것이 사건이라면 사건일 것이다(그저 우리들에겐 날씨일 뿐인데 말이다). 철저히 문어체로 구사된 된 '1인칭 묘사'들은,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담아 낸 묘사거리들이 선사해 낸 '힐링'이 아닌 '불편'을 건넸다.


결국, <어느 작가의 오후>는 페터 한트케의 자기고백의 에세이라 결론짓고 싶다. 짧은 시간 내의 일상을 펼쳐보이는 동안, 작가는 자신의 글이 만들어지는 머리와 가슴을 '지독하게' 엮어냈다. 비틀기의 달인인 만큼, 이 책의 '언어들' 덕분에 모든 잠자고 있던 감각들을 깨워야만 했다. 더 잘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한 시간들이,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오래 걸렸다.


책의 서문에서 인용된 요한 볼푸강 폰 괴테의 희곡『토르과토 타소』의「……모두가 있는 곳에서, 난 아무것도 아니다」는 탁월했다. 모든 외부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한 작가는 실질적인 외로움과 내면의 고독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정신'을 실현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그, 그리고 우리들 또한 '모두가 있는 곳'은 필요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존재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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