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영화<위아영>

중년의 성장영화

40대 중반의 중년의 소소하지만 '아차!'스러운 일상을 그려낸 영화<위아영>. 왠지 '영(young)'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을 법한 영화 속 주인공 조쉬. 조쉬는 부인 코넬리아와 소소한 매일을 살아가지만 그들 사이에는 '아이에 대한 고민'이 있다. 몇 년을 노력해도 아이를 갖지 못한 그들에게는 '가족의 고충'이라는 게 있다. 여기에서 내가 고충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부터 선입관이 배어있지만 나는 이 단어를 애써 지우고 싶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야말로 선입관들로 점철된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40대 중반의 이미지는 외형적으론 결코 어리지 않으며, 연륜이 배어있는 주름살과 뱃살을 갖추(?)고 아이들은 어느정도 커 있고 사회적·경제적으로도 어느정도의 입지를 갖춘 것 정도이다(물론, 이 이미지 또한 내 개인적인 중년의 기준). 내가 생각하는 중년의 이미지에서는 조금 벗어난 조쉬와 코넬리아 부부. 이들은 우연히 만나게 된 젊은 커플(제이미 & 다비)을 만나면서 색다른 재미를 찾기 시작한다.



젊은 커플의 자유분방함을 좋아하는 조쉬. 코넬리아도 젊은이들의 매력에 일순간 취하게 되면서 조쉬 부부와 제이미 커플은 '형태적 친구'가 된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제이미의 행방에 조금씩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 것 또한 내 나름대로의 경험에 의함일까? 나이 많은 조쉬가 되레 순수해보이기 시작했고, 제이미에게는 왠지 모를 반감이 쌓여갔다. 결론적으로 제이미는 '무서운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지인들에게 '일상의 호러물'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조쉬의 입장에서 보면 제이미를 만난 순간부터 '불행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4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일의 일은 예측할 수 없고, 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으며 그래서 딜레마를 겪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잘 그려낸 영화가 <위아영>이다.


조쉬가 방황의 존재임을 형태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조쉬가 제이미와 코넬리아 아버지 사이(연령적으로)에 위치해있다는 점이다. 제이미 앞에서는 상대적인 어른으로 보이지만, 코넬리아의 아버지 앞에서는 철없는 소년 같은 조쉬. 조쉬는 '방황하는 중년'이자, 새로이 겪은 경험 덕분(혹은 때문)에 한 뼘 더 성장하게 된다.


<위아영>은 중년의 성장영화다. 우리는 흔히 '방황하는 청춘'이라는 말을 하는데, 중년 또한 방황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려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청년, 중년, 노년. 이러한 연령적 개념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의 개인적 존재 가치를 재인식시켜준 작품이다.


우리 모두는 '정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어릴 수도 있다. 적어도 앞날에 대해서는 말이다. 조쉬의 일상이 안타깝거나 불행해보여도 마냥 소탕하게 웃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쌉싸래한 현실 위에 녹여진 위트. 블랙코미디의 장르적 특색도 제대로 살려냈기에 더욱이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타인의 취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