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파리의 센강변. 알렉스는 연인을 빼앗은 친구 토마의 목을 조르다가 죽이지는 못하고 강물에 던져버린 후 집으로 돌아온다. 중요한 것들을 기록하는 버릇이 있는 알렉스는 이 날의 일을 '생애 최고의 살인 미수'라고 기록한다. 우연히 아파트 인터폰을 통해 미레이유라는 여인의 존재를 알게 된 알렉스는 미레이유를 운명적인 사랑의 대상이라 직감한다. 미레이유 역시 연인 베르나르의 변심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이들의 운명 같은 만남은 파티장에서 이루어진다. 각자 사랑의 상처로 고통받던 둘은 서로를 만나 사랑과 고통을 나눈다. 하지만 이들의 교감은 한시적인 것일 뿐, 근원적인 외로움과 슬픔을 치유하는 것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어느 날 알렉스는 미레이유를 찾아가지만, 미레이유는 베르나르에 대한 사랑을 지우지 못하고 가위로 자살을 시도한다. 알렉스는 사랑과 치유의 감정을 담아 미레이유를 뒤에서 끌어안지만, 그녀의 옷은 검붉게 물들어간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1984년 프랑스의 레오 카락스(Leos Carax) 감독이 연출한 흑백영화다. 아트나인의 특별전을 통해 만나게 된 영화로, 스크린에서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명작은 언제 봐도 가슴 뛰게 만드는 특징이 있는데, 이 작품 역시 다시 봐도 좋았다.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과 함께 '사랑 3부작'으로 불리는 이 작품에는 사랑의 복잡미묘한 감정들의 극한이 담겨 있다.
사랑을 하면 무언가에 홀린 듯 평소와는 다른 감정과 경험을 하게 된다. 온 세상에 오직 둘만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타인을 제대로 인식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종결의 순간에 대한 두려움을 갖기도 한다. 이 모든 순간과 감정을 담으려고 시도한 것이 <소년, 소녀를 만나다>이다.
함께 할수록 더 외롭고, 서로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괴로운 관계가 있다. 이를 흔히 애증의 관계라 부른다. 사랑했던 사람 때문에 서운하고,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이 죽일 만큼 미워지는 관계로 치닫는 것이 연애다. 외로움과 고통의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반복한다. 그만큼 사랑은 매혹적이다.
찜통 더위에 열을 받은 게임기가 말썽을 부리자 한 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이제 다시는 속지 않을 거야." 재차 시도해보라는 게임기의 꾀임은 너무나 매혹적이고, 그래서 많은 이들은 그것에 중독된다. 앞선 대사는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압축하는 메시지다. 알렉스와 미레이유처럼, 우리 역시 이별을 경험한 직후에 다시 사랑을 시도하기를 반복한다.
결국 <소년, 소녀를 만나다>의 메시지는 '사랑하라'다. 당장 보이지는 않더라도 당신의 사랑이 있으니 사랑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