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책<쇼펜하우어의 청춘독설>

염세주의 철학자의 거침 없는 격언들

19세기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청춘독설>은, 그의 냉철하고 독한 격언들을 엮은 책이다. 고통과 절망을 경험하면서 실존에 힘겨워하던 그의 주장은 무서우리만큼 강력하기에, 읽는 이들의 정신력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 물론, 비관은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들은 독설로써 내면의 독(허황된 욕망)을 배출해내야 마땅한 상황에 처해있다.





맹목적인 낙관이 때로는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행복과 기쁨은 영원히 이어질 수 없다. 물론, 상처와 고통 또한 지속되지 않는다. 삶은, 비관과 낙관이 공존하기에 의미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죽음이라는 생애 최고의 고통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다. 삶에서, 고통은 결코 배제할 수 없으며 크고작은 고통의 산물들은 극한의 비극을 위한 예행연습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염세주의를 비난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염세주의자들을 고통과 비극을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경멸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단 한 번의 고통을 겪거나 타인에게 주지 않은 이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기적인 인간이기에, 고통과 떼러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에게 죽을 듯한 고통을 가하며 탄생한 존재들이다.


사실, 나는 염세주의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편이다. 늘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음을, 당장 내일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삶은 고통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물론, 고통을 반기지는 않지만 그것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고통은 행복과 기쁨이라는 (긍정적)감정을 배가시키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빛과 어둠, 태양과 달이 공존하는 것처럼 고통과 상처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영역이다. 영생과 끊임없는 행복을 바라는 것은 무지하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주장이다. '만일 인간의 무지한 소원이 이루어져 영원히 시간이 주어지고, 모두가 부유해지고, 늙지 않고, 사라하게 되고, 병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인류의 모든 구성원이 행복의 절정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인간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 후에는 어떻게 되냐는 것이다. 권태뿐이다. 인생은 여백만 남게 된다. 어제를 추억하고,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기대해도 떠오르는 것은 거대한 백지다. 하고 싶은 일도 없고, 그리운 사람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다. 축제가 기다려지지도 않는다. 희열도 없다. 만끽도 없다. 배부름도 없고, 포근함도 없다.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지겨울 뿐이다.(p. 128, 129)' 고통을 욕해서만은 안 되는 이유다.


<쇼펜하우어의 청춘독설>은, 많은 것들이 '없다(무의미하다)'고 주장한 쇼펜하우어의 '당당한' 주장들로 엮여있다. 신(神)도, 사랑도 없다고 말한 바 있는 그를 누가 말릴 수 있을까. 그래서 그가 날리는 거침 없는 주장들에서는 '힘'이 느껴진다. 그의 저작들과 편지 및 일기 등에서 끌어모은 날선 격언들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한탄하는 우리들에게 아이러니컬한 방식으로 '희망'을 선사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배가 물 위에 뜨기 위해서는 무게가 필요하듯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근심과 불안, 압력과 불행이 필요하다. 노동, 죄의식, 고뇌, 가난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본질이다. (p. 128)'에서처럼, 노동과 가난으로 힘들더라도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한다. 오히려,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을 겪는 것은 오히려 '필요 요소'라고 말하는 그다.


더불어, 우리의 고통은 실존하는 순간부터 도처에 널려있으니 결연한 의지를 안고 살아가라고 격려한다. '사회라는 외부환경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인간이 외부의 강압적인 요인에 굴복했을 때 우리는 의지를 상실한다. 그 이유는 삶이 나의 뜻대로 순환되지 않고, 외부의 흐름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약한 의지는 자기 탓만은 아니다. 사회에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 그러나 거대한 사회가 구성원 각자의 의지를 존중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표상을 구성해나가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결단, 즉 결연한 의지다. 마음에서 의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지로써 마음을 만드는 것이다. (p. 201)'


결국 <쇼펜하우어의 청춘독설>은, 쇼펜하우어라는 인물과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사랑과 우정이라는 관계, 일과 생활을 아우르는 인간사에서 배제될 수 없는 것이 고통임을 강조하는 그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의 격언들은 '각박한 현실'을 여과 없이 표현하기에 '독설'이라는 단어와 곧잘 어울린다. 두고두고 읽을수록 좋게 다가올 것 같다. 나이듦에 따라 고통과 더욱 친숙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 대부분의 삶 아니겠는가.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쇼펜하우어의 주장이 더욱 깊이 와닿을 것이다.



[책 속에서]


나는 왜 다른 사람의 판단에 휘말리는 것일까? 나에 대한 그들의 평가에 울고 웃는 것일까?

왜 그들의 눈웃음에 화가 나고, 그들의 존경어린 시선에 우쭐해지는 것일까?

내 삶을 평가하고 재단할 권리가 내게 있음에도 나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내가 바라보는 나보다도 그들이 바라보는 나를 더욱 사랑한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그 결론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나는 정직하지가 못했던 것이다. - p. 72


사랑은 고통과 기다림에 대한 인내다. 고통을 치르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내가 나를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나의 고통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래서 나는 이 밤이 부끄럽다. - p. 75


우정은 두 개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

우정을 가진 자는 두 개의 영혼을 가진 자다.

한 영혼이 쓰러지더라도 곁에 있는 또 다른 영혼이 그를 일으켜 세운다.

어떤 경우에도 둘이 함께 쓰러지는 법은 없다. 삶이 인간에게 우정을 선물한 까닭이다. - p. 84


너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또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가질 수 없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가질 수 없다는 진실을 망각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적당히 살아가는 것이다.

몇 분 만에 삶과 죽음으로 나눠지는 이 운명을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 p. 113


소유는 만족을 위함이 아니다.

소유는 의무의 시작이다.

내가 뭔가를 가졌다는 것은 내게 어떤 의무가 주어졌다는 신호다.

많은 것을 가질수록 나는 많은 의무로부터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

내게 신을 향한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 순간,

신의 뜻대로 살아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p. 133

매거진의 이전글 책<혼자 있는 시간의 힘(실천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