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포기한 여자들이 사는 집>. 제목부터 페미니스트들을 유혹한다. 제목처럼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남자와의 사랑을 포기한 여자들이며, 주 배경은 그녀들의 거주지인 아파트이다. 아파트의 이름은 '완전한 행복'이라는 의미가 담긴 '카사 셀레스트'이다.
아파트에 입주한 다섯 명의 여자들은 남자와의 사랑을 거부한다. '여왕'이라 불리는 이 아파트의 주인은 엄격한 철칙을 입주자들에게 제시한다. 이 아파트에는 남자의 방문이 일절 허락되지 않는다. 고로, 아파트에는 '사연 있는' 여자들이 입주해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험난한' 규칙을 지켜나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남자와의 사랑을 갈구하는 입주자가 있다. 바로 '줄리엣'이라는 서른 한 살의 여자다. 그녀는 싼 가격 때문에 이 집을 택했다. 하지만, 여왕과 다른 입주자들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한다. '카를라가 그랬지. "우린 선택했어. 우리 인생에 남자는 없어!" 정말 대단하다. 엄청난 말이야. 왜? 미친 건가? 수녀들인가? 내가 지금 수도원에 와 있나?' 그녀는 자신이 수도원에 온 줄 착각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줄리엣도 과거의 사연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비단 남자 때문만은 아니었으나, '사랑의 결핍'이 존재해왔다. 부모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그녀였다. 물리적 버림이 아닌 정신적 버림이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그녀는 사랑에 대한 염세적인 태도를 갖고 있긴 하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욕망은 거스를 수 없다. 재미있겠도, 그래서 줄리엣은 '카사 셀레스트'를 사랑하기도 했다. 그녀는 다른 네 명의 여성들로부터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모의 포옹 한 번 받지 못했던 그녀에게, 아파트 거주자들은 관심을 줬다. 그것을 줄리엣은 '사랑'이라고 여긴다.
<남자를 포기한 여자들이 사는 집>은, 아파트 거주자들의 '사연'을 하나씩 소개한다. 그들이 왜 남자들을 멀리하게 됐을까. 여기에 대한 '이유'들이 설명된다. 이유들은 특별하지 않지만, 그래서 공감을 살 만하다(사실, 사랑이라는 건 보편적인 거 아니겠는가). 그녀들은 사랑을 힘들어한다.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을 하는 것에는 힘들어한다. '그러나 그녀는 완전히 열린 가슴으로, 정말로, 미친 듯이, 단 한 번만 사랑하고 싶었다. 너무 가까이? 너무 멀리? 사랑하는 사람과의 적정한 거리를 알려주는 줄자는 없나?'
줄리엣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사연이 있다한들, 이렇게 평생 남자를 거부하며 살 수 있겠냐고. '사랑이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는 그녀에게 다른 거주자들은 이해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녀들 또한 과거에 '열정적인 사랑'을 했다. 특히 여왕은 천 명의 남자와 상대했었다. '천 명의 남자, 천 개의 섬광' 그녀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어찌됐든, 소설은 사랑(남자)을 포기했던 여자들에게 사랑을 '수용'하는 구도로 바꿔나간다. 사랑은 인간의 본능이다.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아픔과 상실이 있지만 결코 거부할 수 없는, 행복의 주 요소인 것이 사랑이다. 작중 시몬은 이렇게 말한다. "행복은, 햇살 눈부신 잔디에 앉아 과자를 먹는 것처럼 아주 작은 거야." 사랑은 이 행복의 순간을 자주 느끼게 만들어 주는 주 요소가 아닐까. 행복은 대상의 크기를 요하는 것이 아닌 잦은 횟수를 요한다. 자주 느끼는 행복이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준다.
사랑. 사랑의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소설 <남자를 포기한 여자들이 사는 집>. 줄리엣의 직업이 영화편집자인 만큼, 소설에는 영화들이 소개되고 그 속의 명대사들도 이따금씩 언급된다. 로맨틱하고, 사랑스러운 소설이다. 페미니스트들을 유혹할 줄 알았던 작품이, 결국은 욕망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만드는 '반전(?)'이 있는 작품이다. 서평의 끝은, 여왕의 메시지로 마무리하겠다. '인생은 하나의 줄이다. 우리는 그 줄 위의 곡예사다.'